우리가 누리는 풍요는 희생자 위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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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누리는 풍요는 희생자 위에 핀 꽃
  • 최성웅
  • 승인 2017.11.23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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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웅 충북일보 전 논설위원

경부고속도로는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각 종류의 수많은 차량이 밤낮으로 도로를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절 때면 서울~부산 간 428km를 12시간 걸려 주파했느니, 아예 길 위에서 밤을 새웠느니 하는 무용담이 오고 간다.
명절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주말에 가족 나들이라도 나섰던 사람들은 적지 않은 시간을 고속도로에서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모두 앞차에 밀려 움직이지 않는 차 안에서 아예 처음부터 도로를 널찍하게 닦았어야 하는 푸념을 한다.
그런데 거의 모든 물자를 인력에 의해서 원시적으로 운반하던 나라가 100년도 못 되어 세계 유수의 고속도로망을 보유한 교통 대국으로 성장했다.
2005년 대한민국 고속도로는 2804.3 6km 두 가닥의 민자 고속도로를 합치면 2922km로 세계 10위권의 네트워크다.


1965년 당시 대한민국이 보유한 자동차 총 보유 대수가 4만1천대 인구 7백명당 1대 보유라는 세계 최저 수준의 교통문화 후진국에서 불과 40년 만에 세계 일류 국가로 진입한 기적의 도약이다.
이러한 성취는 오로지 한 인물의 비범한 결단에서 비롯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력’ 1967년 4월 대한민국 6대 대통령선거 박정희 후보는 고속도로 건설을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그가 품은 고속도로의 꿈은 기실(其實)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었다.
1954년 미국 포병학교에서 위탁 교육을 받을 당시 이열혈 장교의 고속도로는 일반도로에 비해 3배의 교통량을 소화하고 2배의 속력을 낼 수 있으며 사고율은 5배를 줄일 수 있다는 고속도로 시설에 매혹됐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우리도 고속도로를 건설해야 한다는 신념은 10년 후 마침내 웅장하게 피어날 결정적 계기를 맞이한다.
1964년 12월의 서독방문은 박 대통령이 고속도로의 필요성과 효율성에 대해 확신을 굳히는 기회가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왜 고속도로에 그렇게 집착을 했을까? 당시는 철도가 대한민국의 거의 유일한 운송 수단이었다.


1962년부터 추진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결과 급격한 생산량 증가, 기자재량의 폭주, 생활 환경의 확대 등으로 수송량과 여객량이 증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세계은행(IBRD) 조사단은 대한민국에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를 아예 무시했다. 한국의 국력과 장비, 기술 및 제반 여건으로 보아 고속도로의 건설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것이 그들의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당시 일본이 건설 중이던 도메이(東名)고속도로 (도쿄~나고야)의 건설비를 기준으로 하면 경부고속도로의 예상 건설비는 3,500억원이었다.
1967년 국가 예산이 1,643억원이었으니 우리 국민이 2년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어도 겨우 완공을 할까 말까 하다는 계산이었다. 박대통령은 관계기관별로 추정 건설비를 조사하라고 했다.
갑론을박 난상토론에 이은 수많은 더하기 빼기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공사비를 최대한 절약하면 공사 기간 3년 이내에 300억원의 건설비로 고속도로를 닦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고속도로 건설 반대자들’ 이번에는 야당과 국민의 반대가 발목을 잡았다.


자동차도 없는 나라에 고속도로가 웬 말이냐. 놀러 다니는 사람한테나 좋은 일 시키는 거지 전 국민이 대대손손 빚에 허덕일 거다.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와 다를 것이 없다. 돈 내고 길 다니라는 게 말이 되느냐. 사람은 못 다니고 자동차만 다닌다니 이거 차 안 가진 국민을 차별하는 것 아니냐. 목청을 높여 반대했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는 반대자들의 숱한 비난을 무릅쓰고 1970년 7월에 개통되었다.
추풍령에 이르거든 경부고속도로 준공탑과, 위령탑을 찾아 순국선열 호국영령 산업전사 제위께 술 한잔 부어 올리고 그윽한 감사의 뜻을 표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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