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가엾은 장애여성을 고통의 늪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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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가엾은 장애여성을 고통의 늪으로…”
  • 임요준편집국장
  • 승인 2018.03.29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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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남성, 여성장애인 상대 수십 년 간 성폭행에 임금착취까지
가해남성 소개 피해 여성이 일했던 M식당 “2003년 말부터 일했다”
반면 피해 여성 2001년 M식당으로 주소지 전입신고 해 ‘진실공방’

옥천군 청산면의 한 시골 마을. 여느 시골 마을과 같이 평온하기만 한 이곳에서 한 여성장애인이 수십 년간 성폭행에 임금착취까지 당했다는 검은 뒷모습이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사건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피해여성 A씨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사망과 장애를 지닌 어머니를 대신해 당시 이 마을 이장인 B씨 부부를 부모처럼 따랐다.
하지만 아버지로 섬겼던 이로 인해 고통의 늪으로 빠질 줄은 이때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B씨가 부모로서 해서는 안 될 성추행이 시작되더니 급기야 성폭행이 지난해까지 이어진 것이다. 

장애여성 결혼 후 성폭력 자행
A씨의 주장에 따르면 중학교에 다닐 때이다. 하교 후에도 성폭행은 이어졌다. 이후 A씨는 Y씨를 만나 경제적 어려움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채 동거에 들어갔다. 지체장애를 지닌 Y씨는 A씨를 따라 B씨를 양부모로 섬겨왔다.
하지만 B씨의 만행은 A씨가 가정을 꾸린 이후에도 계속됐다. 지난해 12월 한 언론을 통해 B씨의 만행이 알려진 후 B씨는 Y씨에게 일련의 사태에 대해 사과했다.
Y씨는 “양아버지(가해자 B씨)는 나를 불러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A씨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황당하기만 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 안 난다”
B씨의 만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B씨는 평소 친분관계에 있는 K씨가 운영하는 옥천읍 M식당에 A씨 취업을 알선했다.
대전시 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 따르면 A씨는 M식당에서 지난 2000년 9월부터 2003년 5월까지 근무했다.
당시 급여는 월 100만원이며, 10만원은 A씨에게 지급하고 나머지는 B씨가 받아 챙겼다는 것이다.
사실여부를 확인 차 M식당 K대표에게 의견을 들었으나 A씨 측 주장과는 다르다.
K 대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2003년 말에서 2004년 초까지 7개월 정도 근무한 것으로 안다. 임금은 70~80만원 사이로 기억한다. 현금을 노란봉투에 넣어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기자가 확인한 결과 A씨는 2001년 6월 4일 M식당 주소지로 주민등록 전입신고를 마쳤으며, 이듬해 12월 6일 전출했다. 이 기간만도 19개월에 달한다.

A씨가 주장하는 근무기간 내에 이뤄진 전·출입 내용이다.
K 대표가 주장하는 근무시작 전 A씨가 M식당으로 거주지 전입에 대해 K 대표는 “전입신고를 한 이유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15년 전 일이라 (근무기간을)유추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 이전으로는 기억을 살릴 수 없었다”며 모호한 답변을 남겼다.
또한 A씨는 해당 식당에서 퇴사 전, 칼 작업을 하다가 손가락 일부가 잘려나가는 사고를 당했다. 인근 병원에서 치료는 받았지만 치료비에 대해 M식당은 산업재해보험을 적용하지 않고 직접 처리했다. K 대표는 “병원치료비는 다 해줬다. 금액은 기억나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직접 줬는지 병원에 결제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위로금은 달라는 적도 없었고 주지도 안했다. 산재보험은 당시에는 활성화 되지 않았다”며 “당시에는 의무가입이 아니어서 안했다. 근로계약서도 의무적 작성규정이 몇 년도부터인지 모르지만 전 직원이 작성 안했다. (설사)근로계약 돼 있다하더라도 보존자료가 없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M식당은 근로기준법(1953년 첫 제정·공포, 1997년 새로 제정·공포)에 규정된 근로계약서 미작성과 종업원 대상 4대보험(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도 2006년부터 가입하기 시작했다. 산재보험은 1964년 첫 시행됐다.
그는 이번 사태에 대해 “내 식당이 거론된 것에 마음이 아프다. (A씨가)근무 시 성폭행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오래된 일이라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이후 A씨가 일한 또 다른 C식당. A씨는 이곳에서 2013년 6월부터 2014년 12월까지 근무했다. 중간에 한 달가량 휴직하기 전에는 매월 110만원씩, 이후에는 120만원의 임금을 받았다. 이중 매월 107만원이 B씨 통장으로 입금됐다.

C식당 관계자는 “급여를 입금하려고 은행계좌번호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B씨 명의의 번호를 가져왔다. 본인이 가져온 번호라서 아무 생각없이 그대로 입금해 줬으며, 은행 거래내역이 있어 경찰에 제출했다”고 답변했다.
이 모든 사태에 대해 B씨는 “일부내용은 인정하지만 수사가 진행중이어서 지금으로선 다 말할 수 없다”며 말을 아꼈다.

마을 분위기 침체
충북지방경찰청과 옥천경찰서가 수사에 착수한 가운데 사건의 중심에 선 해당 마을은 ‘흉흉’ 그 자체다. 마을회관과 경로당에서, 혹은 두 세 사람만 모여도 쉬쉬거리며 혀를 차댄다. 여러 언론에서는 마을에 진을 치고 취재에 열을 올린다. 조용한 시골 마을이 불행한 사건의 전국적 관심지역이 된 꼴이다. 

주민 A씨는 “이전부터 소문이 나돌기는 했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 생각했는데...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마을이 뒤숭숭해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경찰과 검찰에서 하루빨리 사건이 마무리 돼 마을이 안정되어야 한다”며 심경을 토했다.
대전시 장애인권익옹호기관 관계자는 “(이런 사건의 경우)피해자와 가해자는 종속관계가 형성돼 쉽게 신고하지 못한다. 특히 시골마을의 경우 주민들마저 저렇게 살아도 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어 피해자는 현장에서 나오지 못한다. 주민과 피해자 모두 의식변화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려서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장애여성. 그에게 마을이장은 아버지와도 같았고, 절대적 권력자의 뜻에 반한 행동은 곧 절대자에 대한 반항과도 같았다. 그러기에 저항이란 곧 죽음과도 같았기에 권력 앞에 한없이 무너져야만 했던 장애여성. 세상을 향한 그의 외침은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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