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해금 30주년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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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해금 30주년을 맞으며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8.04.26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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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1988년 3월 31일. 정지용의 작품이 해금되었다. 이번 해에 해금 30주년을 맞이하였다.
분단과 이데올로기라는 거대 담론에 갇혀 매장되었던 혹은 영원히 매몰될 위기에 처했던 소중한 문화유산이 우리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다양한 언어체계를 통해 작품을 구사하였던 정지용은 그의 생애 자체도 많은 이들에게 의구심을 갖게 한다. 덕분에 더 많은 정지용 연구가들에 의해 연구논문이 생산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정지용의 삶과 관련, 여러 가지 이견이 있으나 6·25 이후 생사가 불분명한 것은 사실이다. 생사 불분명 이후 정지용은 월북이라는 오해와 함께 그의 작품은 금서가 되었다가 1988년 김기림의 작품과 함께 해금되었다.

당시 시대상을 고려해 볼 때 사상성과 거리가 멀었던 그들 문학의 본령을 지키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역사는 그런 것인가 보다. 본질은 가끔씩 빛을 잃기도 하고, 숨기도 하며, 누군가에 의해 숨겨지기도 하는 것인가 보다. 안타깝고 서글프지만 필자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 진실은 항상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다소 시간이 지체될 뿐이다. 그래서 안도할 뿐이다.

정지용, 김기림에 대한 해금은 1978년 ‘연구개방원칙’시사 아래 문단 및 학계, 유가족, 매스컴 등의 거듭된 해금 촉구가 이어진지 10년 만에 실현되었던 성과였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살린 이들의 작품이 반세기 만에 다시 빛을 본 날. 장남 정구관은 “아버지 해금 탄원이 나의 지난 10년 삶의 전부”였다며 “부친의 해금이 우리 문학사의 복원을 이루는 계기가 되도록 노력”(『중앙일보』, 1988.4.2.)하겠다며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한편 기형도는 「40년 불구 ‘한국문학사’복원 첫걸음」(『중앙일보』, 1988.4.2.)에서 “이번 조치는 정부의 ‘해금 단행’이라는 적극적 태도보다는 ‘해금 인정’이라는 소극적 태도에 불과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라며 “문공부가 지용, 기림 외에 나머지 납·월북 문인들의 작품도 단계적으로 해금하겠다는 사실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고 평하였다.
학계에서는 정지용과 김기림 두 시인에게만 국한시킨 해금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보냈다. 한국문학사의 온전한 복원에 두 시인만의 해금으로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해금된 날은 역사 기록의 한 장면이 되었다.
당시 정치, 사회 분위기가 납북 혹은 월북설이 나돌던 한 사람의 작가를 기존과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는 것.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성(姓)이 바뀐 혼란과 비슷한 정체성의 혼동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정지용의 해금을 추진하였던 사람들. 그들은 때론 신변의 위협과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를 살펴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학계와 유명문학인들의 서명을 받는 과정에서 “나는 (정지용을)모른다”거나 “나는 지금 (정지용 해금에 수긍하고 동의하나)요주의 인물로 몸을 사려야 하니 봐주게”라는 반응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하는 역사를 슬프게 증언해준 분도 있다.   

그래도 누군가 하여야 했고 해내야만 하였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정지용의 작품이 우리 곁에 머물 수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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