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과 눌인(訥人) 그리고 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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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과 눌인(訥人) 그리고 교토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8.08.09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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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정지용 유학시절 흔적을 찾자는 여름 목표수행을 위해 도착한 교토는 분주함 속에서 조용하다.

정지용은 그의 산문 「압천」에서 당시 하압(下鴨)은 “물이 더럽고 공기가 흐려 서있기가 싫”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름이면 이곳에 월견초가 조석으로 흩어져 피어났다고도 적었다.

2018년 7월 교토는 40도를 넘나들었다. 뿐만 아니라 교토의 압천에는 월견초도 보이지 않았다. 월견초 대신 엄마랑 재미삼아 낚시를 하는 꼬마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는다.

정지용이 90여년 전에 걸었을 압천을 따라 걸었다. 압천의 물은 맑았다.
정지용은 동지사대학교 쪽 중압에서 건너다 보이는 곳에서 하숙을 하였다고 한다. 정지용 하숙과 관련, 『원전으로 읽는 정지용 기행산문』(깊은샘, 2015)에 밝혀 놓은 바 있다. 그가 하숙을 하며 걸었을 길을 걷고 압천의 다리를 건너보았다.

교토 탐방에 동행한 김다린 수필가는 “압천에 실크 염색을 하던 곳”이 있었다며 중압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일러준다. 일본 역사를 전공한 그녀의 말은 정지용이 말한 “우선(友禪)을 염색, 표백”하였다는 대목과 일치한다.
압천 물에 씻은 비단이 윤이 나고 옥같이 희다고 하였다. 그래서 압천에 목욕한 실크는 유명하였고 꽤나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단다.

정지용은 일본에서 유학을 할 당시, 그의 고국 조선은 일제강점기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면 마음이 뒤숭숭 복잡해진다. 당시 정지용의 심정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복잡하였으리라. 하염없이 주체할 수 없는 슬픔 덩어리가 산 채로 불쑥 거린다. 그것은 심장의 한복판에서 끓다가 언젠가 분화구처럼 솟아오를 것이다.

정지용이 이러한 분화구의 분출구로 선택한 것, 그것은 시를 쓰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어 하였다. 즉 독자뿐만 아니라 청자에게도 전파하고 싶어 하였던 것이다.

동지사대학 시절 그는 많은 시를 생산하였다. 그렇게 생산된 시를 후배 눌인에게 들려주었다. 서른다섯에 요절한 문학평론가 눌인. 일제 강점기 카프계열의 경향문학이 유행하고 일부 문인들이 친일적 문필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할 때, 문학은 오직 문학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눌인.

그 시대 많은 비평가들이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었다고 탄식을 하였지만 그는 한숨이 아니라 실제로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 평필을 들고 일어났다고 후대의 평론가들은 눌인을 평가(권영민 역, 『김환태 전집』, 문학사상·무주문화원, 2009)한다.

이러한 눌인은 「정지용론」에서 “어른처럼 분별 있고 신중한가하면 어린애처럼 천진하고 개개바르다”며 “언제나 명랑하고 경쾌한 낙천가”로 평가하면서 정지용의 마음은 “늘 태풍을 만나 바다같이 동요”하였는데 이는 “정밀과 질서의 세계에 대한 향수를 낳”는다고 하였다.

정지용은 눌인에게 자신의 순수함과 비애와 고독을 담은 시를 읊어 주었다. 동지사대학 옆에 있는 상국사로 데리고 가서. 달도 없는 그믐밤이면 그 목소리가 더 간절하고 서러웠을 것이다.
이렇게 천재라고 불리는 시인 정지용과 식민지 청년의 우수가 언제나 눈가에 맴돌았다는 눌인. 이 둘은 시낭송을 다리삼아 식민지 현실의 아픔을 서로 교감하고 있었다.

K와 Y라는 고향 친구를 찾아 교토에서 2-3일 쉬려고 갔다가 그들과 떨어질 수 없고 교토를 떠나기 싫어서 동지사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는 눌인. 그는 입학 후 신입생 환영회에서 정지용을 만난다.

이러한 복잡한 생각들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동지사대학 교정을 나와 상국사로 향하였다. 여전히 교토 7월 중순의 날씨는 40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부채도 없이 걷는 교토의 거리에서 ‘訥人’이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얼마나 겸손한 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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