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과 『학조(學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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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과 『학조(學潮)』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8.08.2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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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친일도 배일도 못”한 정지용은 “산수에 숨지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다고 「조선시의 반성」에서 고백한다. 그래도 영혼처럼 부여잡고 시작(詩作)을 이어오던 그는 “국민문학에 협력”하든지 그렇지 못하면 “조선시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신변의 협위를 당”하게 되었다고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상황을 토로한다.

뿐만 아니라 “일제 경찰은 고사하고 문인협회에 모였던 조선인 문사배에게 협박과 곤욕을 받았”던 것이라고 실토하는 부분. 여기서 필자는 고개가 숙여지고 목울대를 타고 오르는 뜨거운 분노마저 삭여내야 한다. 목을 타고 내려가던 분노가 명치쯤에서 쌔-하니 뭉치고 만다.

망국민의 서러움을 달래며 서로 다독이고 민족의 동질성과 민족의식을 앞장서서 고취해야만 하였던 그들. 그러나 그들의 생과 환경은 또 다른 문인에게 협박을 가하고 곤욕을 치르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정녕 그렇게 하는 행위만이 그들이 살 길이었던가?

문학과 삶은 “따로” 또는 “같이”라는, “일치” 또는 “불일치”라는 생각에 그들을 이해하려한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은 개운치 않다. 그러나 정지용의 문학과 삶은 “같이”와 “일치”에 방점을 찍어두고 싶다.
그는 일제 식민 지배를 받아야만 하였던 시대적 현실 속에서 그 아픔과 고통 그리고 민족의 비애를 그의 시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이러한 정지용의 초기시편들에 대하여 일별하려면 『學潮』를 건너가야만 한다. 그래야 그의 시와 당시 문우관계 상황도 개괄적으로 또는 촘촘히 살필 수 있음이다.

『학조』는 1926년 6월 27일자로 창간된 ‘재경도(在京都) 조선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였다. 편집발행 겸 인쇄인은 김철진이고 발행소는 경도학우회이며 동성인쇄소에서 인쇄한 A5판 159면으로 정가 50전으로 발행되었다.

정지용은 동지사대학 재학 시절, 『學潮』 창간호에 “童謠”라는 큰 제목 아래 “별똥이 떨어진 고슬 나는 꼭 밝는날 차저가랴고 하엿섯다. 별으다 별으다 나는 다 커버럿다.”고 적었다. 그리고 「띠」, 「감나무」, 「한울혼자보고」, 「딸레(人形)와아주머니」, 「서쪽한울」, 「카페프란스」와 「마음의 일기에서」(시조 9수)를 발표한다.(최동호 역, 『정지용전집』1, 서정시학, 2015)
이로 미루어보아 당시 정지용이 경도에서의 시인의 위치를 확고히 선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또한 『학조』에는 현해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성악가로 알려진 윤심덕(1897-1926)과 최후를 맞이한 김수산(1897-1926:‘水山’은 극작가 김우진의 호)의 마지막 희곡 작품인 「두데기 시인의 환멸」이 실려 있다. 이 작품에 두데기 시인 이원영의 입에서 ‘情死’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김수산이 자신의 미래를 예견했음인가. 후에 윤심덕과 김우진을 서양에서 보았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어찌되었건 1926년에 조선은 비중 있는 예술가 2명을 한꺼번에 잃게 되었음은 분명하다. 슬프다.

한편 최현배는 전6항으로 된 논문 「기질론(氣質論)」을 15면에 걸쳐 『학조』에 발표한다. 이는 1925년 경도제대를 졸업한 선배로서 기고된 것으로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되기 전 한글 모습을 견줄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높다.

당대 최상의 수준을 보여준 시인 정지용은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유학생의 절망과 비애 그리고 조국을 잃은 서글픔을 시로 위로하며 『학조』를 매개로 당대 최고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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