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의 「돌아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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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의 「돌아오는 길」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8.09.06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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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누군들 싸움 한 번 해보지 않았겠는가?
하물며 일제강점기, 일본 교토에서의 정지용 유학(1923-1929)생활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어려운 한 시대를 살아내면서 지나온 정지용 인생의 한 토막이었던 유학시절.

정지용이 동지사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느꼈을 서구문학의 경이로움과 황홀감, 그것은 오히려 고향에 대한 향수와 고독감 그리고 조국에 대한 상실감을 더욱 확대되게 하는 자극제 역할을 하지는 않았을까?

이때 정지용은 향수, 고독, 상실감을 위로하고 망국민의 비애와 울분을 터트려 놓아야할 마땅한 재료가 필요하였다. 그것의 일환으로 선택한 것이 시를 쓰는 일이었고 그는 미친 듯이 시를 써냈다.

그리하여 정지용은 1926년 12월 『근대풍경』에 일본어 창작시 「かっふえㆍふらんす」와 1927년 3월 「手紙一っ」를 무작정 투고하게 된다.(김학동, 『정지용연구』, 민음사, 1997, 155면.) 이때 『근대풍경』 편집자는 일본 기성시인과 같은 크기의 활자로 이 작품들을 실었다. 이는 정지용의 작품 수준과 발전 가능성을 예견한 일본 문단의 영향과 기타하라 하큐슈(北原白秋)의 예리한 문학적 혜안(慧眼)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사실 이때부터 정지용이라는 거대시인이 그것의 가치를 최초로 인정받고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이후 정지용은 『근대풍경』 2권 6호(1927. 7.)에 일본어 창작시 「歸り路」을 발표한다.(최동호 엮음, 『정지용 전집1』, 서정시학, 2015, 346면.)

石ころを  けつて  あるく.
むしやくしやした  心で,
石ころを  けつて  あるく.
すさまじき  口論の  のち,
腹が  へつて  歸り路の,
かんしやくだまが,
氷つた  つまさきで  嘶く.
「歸り路」 전문

「歸り路」를 발표할 무렵, 정지용은 상당히 모호한 혼란스러움과 불안감이 팽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국의 현실과 종교적 문제 그리고 자녀의 사망과 출생은 끊임없이 정지용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겨줬다. 정지용에게 끊임없이 찾아드는 불확실성. 그는 그것에 대한 깊은 고민을 떨쳐버리지 못하였다.

정지용은 이러한 자신의 불안감을 시를 쓰며 견뎌냈을 것이고 시에서 갈등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자아와 세계와의 갈등을 잦아들게 하는 일환으로 선택한 정지용의 작품쓰기. 그것은 정지용과 가까웠던 이들의 월북과 죽음 앞에서도 “울화통이” 치밀어 자아와 끝없이 싸움질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싸움질은 1950년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을 때까지 “배가 고파 돌아오”며 계속 되었음이리다.

돌멩이를 차며 걷는다.
짜증난 마음으로,
돌멩이를 차며 걷는다.
심한 말다툼 후,
배가 고파 돌아오는 길,
울화통이,
언 발끝에서 운다.
「돌아오는 길」 전문

정지용은 아마 「歸り路」을 쓰며 외부적인 요인과 함께 내부적인 자아의 세계와 심한 말다툼을 하였을 것이다. “배가 고파 돌아오는” 정지용을 생각하며 필자는 지난 4일 ‘명사시낭송회’에서 「돌아오는 길」(「歸り路」)을 낭송하였다.

“시작품 속에는 시인이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의미가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던 이숭원의 말과 “울화통이” 치밀어 “돌멩이를 차”며 걷던 정지용의 고뇌를 함께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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