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의 「평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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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의 「평양1」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8.09.20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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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판문점 봄이 평양의 가을이 됐다”, “저 높은 곳을 향한 남북 정상의 시선” 한 조간신문(9월 19일)의 1면을 장식하는 언어다.

남북 두 정상이 전 세계인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그 결실을 위하여 정상회담을 열고 있다. 이 모습을 보며 필자는 아직 마치지 못한 숙제를 떠올린다.

머리가 무겁다. 정지용 관련 기행산문 즉 『정지용 만나러 가는 길』을 발간할 때 북한 쪽을 미완인 채로 세상에 내놓았던 적이 있다. 이는 평양, 의주, 금강산 등을 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완성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는다.

정지용은 1930년대 후반부터 산문을 눈에 띄게 많이 발표하고 있다. 이는 어렵고 힘든 국내외의 상황(일본의 신사참배 강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 서안사건,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 공포 및 시행,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 4차 무기정간, 수양동우회 사건, 중일 전쟁 발발,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회 결성, 국민 정부 국공합작 선언, 남경학살사건 발발, 흥업구락부사건, 2차 대전 시작, 『조선일보』,『동아일보』 폐간, 황국식민화운동 본격화, 독일, 이탈리아, 일본 3국 군사 동맹, 모택동 ‘신민주론’ 발표 등)과 문단의 영향 그리고 가정사의 복잡함(오남 구상 출생과 병사, 부친 사망 등) 때문에 정지용은 산문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정지용이라는 작가가 경험적 자아로 표출되는 수필 중 작품외적 세계의 개입이 없는 세계의 자아화로서의 서정인 「평양1」. 이는 일상생활이나 자연에서 느낀 감상을 솔직하게 주정적, 주관적으로 표현하며 대개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기초로 하여 자연에 대한 서술을 주로 하고 표현 기교에 유의하기 때문에 공리성보다 예술성이 강조되기도 하는 수필이다.

(전략)무슨 골목인지 무슨 동네인지 채 알아볼 여유도 없이 걷는다. 숱해 만난 사람과 인사도 하나 거르지 않았지마는 결국은 모두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만다. 누구네 집 안방 같은 방 아랫간 보료 밑에 발을 잠시 녹였는가 하면 국수집 이층에 앉기도 하고 (중략) 오줌을 한데 서서 눈다. 대동강 얼지 않은 군데군데에 오리 모가지처럼 파아란 물이 옴직 않고 쪼개져 있다.

집도 친척도 없어진 벗의 고향이 이렇게 고운 평양인 것을 나는 부러워한다. 부벽루로 을밀대로 바람을 귀에 왱왱 걸고 휘젓고 돌아와서는 추레해 가지고 기대어 앉는 집이 ‘La Bohem.’ (중략) 길의 어느 시대의 생활과 슬픔이었던 것이라는 그림 아래 牛山 의 어느 <석류>가 걸려 있다. ‘정물’이라는 것을 ‘still life(고요한 생명)’이라고 하는 外語는 얼마나 고운 말인 것을 느낀다. (후략)  (「평양 1」, 『동아일보』, 1940.)

「평양1」은 화가 길진섭과 북쪽 지방을 여행한 기행수필이다. 길진섭이 그곳에서 “낳고 자라고 살고 마침내 쫓겨난 동네”라고 표현한 정지용의 언어는 이국에 대한 매혹으로 먼 미지에 대한 결과물인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근대에 대한 퇴폐와 시대적 현실의 절망에서 오는 “쫓겨난 동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절망도 잠시 길진섭의 고향인 이곳을 곧 부러워한다. 정지용은 타향인 이곳 “La Bohem”을 좋아한다. 그는 이 다방에 가방, 외투까지 맡기고 여행을 다닐 정도였으니.

정지용에게 외부로의 생경함이 편안함과 아름다운 경치로 자리하게 되는 셈이다. 미완성으로 마친  모딜리아니 그림에 대하여 정지용은 “애연히 서럽다”고 말한다. 정지용의 “모딜리아니”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이렇게 서정화해 가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그대로 서술자가 되어 사실의 세계를 다루는 산문의 한 갈래인 수필의 재료를 평양에서 구해온 정지용. 그는 알고 있는가? 길진섭 화가와 걸었던 그 길에 가을이 왔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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