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아가 잃어버렸다던 정지용의 「옥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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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가 잃어버렸다던 정지용의 「옥류동」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8.11.0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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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정지용은 갔다.
용아도 갔다.
자존감과 굴욕감 그리고 현실의 말 못할 배반감으로 일제강점기라는 다리를 건넜을 그들. 용아는 달빛이 쏟아지는 병실에 있었을 것이고 정지용은 용아의 문병을 마치고 밤새 달빛이 잉잉대던 세브란스 병원 골목길을 걸었겠지. 그때도 오늘처럼 시린 달빛을 머리에 이고 걸었을까?

시린 달빛이 창밖의 언어로 노래할 때, 그 언어를 간조롱히 갈무리하여야 하는 것이 문학평론가의 임무다. 그렇기에 오늘도 정지용 주변을 맨 얼굴로 서성거린다.

누군들 상처 없이 지내겠는가? 하물며 며칠씩 꿍꿍거리며 탈고한 원고를 잃어버렸을 때의 허탈함을 글을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았을 법하다. 그것은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기도하고 어두운 그늘로 침잠하기도 한다.
금강산 기행 후 정지용은 「비로봉」, 「구성동」, 「옥류동」을 쓴다.

그런데 정지용이 가장 아꼈다던 「옥류동」을 용아가 『청색지』에 싣고자 가져갔다가 잃어버렸다. 정지용과 용아가 『청색지』 창간호에 멋있게 장식하고자 하였던 「옥류동」. 그 원본은 그렇게 분실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의 심정을 정지용은 “『청색지』 첫 호에 뼈를 갈아서라도 채워 넣어야할 것을 느끼며 이만.”이라고 「수수어 3-2」(『조선일보』, 1937. 6. 9.)에서 서술한다. 정지용은 그만큼 작품에 대한 애착과 책임감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옥류동」은 용아가 떠나기 전에 정지용이 완성하였다.
그 후 정지용은 뼈를 깎는 고통으로 채워 넣었는지 『조광』25호(1937.11.)에 「옥류동」을 발표하게 되었다. 정지용의 기억에 의해 되살아난 「옥류동」을 당시 표기대로 적어본다.

골에 하늘이
따로 트이고

瀑布 소리 하잔히
봄우뢰 울다.

날가지 겹겹히
모란꽃닢 포기이는 듯

자위 돌아 사푹 질ㅅ듯
위태로히 솟은 봉오리들

골이 속 속 접히어 들어
이내(晴嵐)가 새포롬 서그러거리는 숫도림.
 
꽃가루 무친양 날러올라
나래 떠는 해.

보라빛 해ㅅ살이
幅지어 빗겨 걸치이매

기슭에 藥草들의
소란한 呼吸!

들새도 날러들지 않고
神秘가 힌끝 제자슨 한낯.

물도 젖어지지 않어
흰돌 우에 따로 구르고

닥어 스미는 향긔에
길초마다 옷깃이 매워라.

귀또리도
홈식 한양

뭉짓
아늬 긘다.

『청색지』 발간을 꿈꾸며 금강산 기행을 떠났다던 정지용과 용아.
용아가 잃어버렸다던 「옥류동」은 정지용이 기억을 더듬어 말쑥하게 손질하였다. 정지용의 시적 언어감각에 스스로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정지용은 이렇게 금강산의 신비경과 동양적 정서를 시공간적으로 확장·묘사하여 세상 밖으로 내밀었다. 그렇게 다듬은 「옥류동」을 정지용은 병석에 누워있는 용아에게 가서 낭음해 주었다고 한다.

정지용과 용아는 「옥류동」처럼 아끼고 애석한 것들을 다 버리고 가버렸다. 그들이 아직도 못다 잊었을 문학세계의 발끝을 쫒는다. 그리고 달빛 아래 가만히 서본다. 그 아래에서 「옥류동」을 다시 생각한다.

문학이란 참으로 괴롭고 긴 것이다. 동짓달 시린 달빛이 자꾸만 발끝에 매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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