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의 고독과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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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의 고독과 「병」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8.11.2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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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문학평론가

「한울혼자보고」와 「병」.
정지용은 같은 작품에 다른 제목을 붙여 독자 앞에 불쑥 내밀었다. 그것도 10년 간격을 두고 말이다. 이는 정지용이 시나 독자들을 향해 부르짖은 곤조나 시위의 일종은 아니었을까?
정지용에게 시는 자신의 고통과 울화통 그리고 그리움을 털어놓는 공간인 병이었다. 이 통로의 작용은 시로 응축되어 고독이라는 병을 낳기도 하고 그 병을 치료하기도 하는 중의적 의미를 수반한다.


1926년 『학조』에 발표한 「한울혼자보고」는 고독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1935년 『정지용 시집』에 발표된 「병」은 병(bottle)을 중심 제재로 한다. 시적화자는 병을 깨뜨려야만 하는 어떤 의식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하늘’이 보이는 것이다. 물론 「한울혼자보고」에서 병을 깨뜨리는 과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이 두 시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 시는 화자나 독자에게 다른 시선을 요구하고 있다.

부에ㅇ이 우든밤
누나의 니얘기—

파랑병 을 면
금세 파랑 바다.

강병을 면
금세 강 바다.

국이 우든 날
누나 시집 갓네—

파랑병 ㅅ들여
하눌 혼자 보고,

병 ㅅ들여
하눌 혼자 보고,

-「한울혼자보고」 전문. 『학조』1호, 1926. 6, 106면.
(최동호 역, 『정지용 전집1』, 서정시학, 2015, 48면 재인용)
*“병”의 두꺼운 시어처리는 필자가 ‘강병’의 오탈자 형태는 아닐까에 대한 의문이 일어 따로 구분하였다.

부헝이 울든 밤
누나의 이야기

파랑병을 깨치면
금시 파랑바다.

빨강병을 깨치면
금시 빨강 바다.

뻐꾹이 울든 날
누나 시집 갔네—

파랑병을 깨트려
하늘 혼자 보고.

빨강병을 깨트려
하늘 혼자 보고.

-「병」 전문, 『정지용 시집』, 시문학사, 1935, 106-107면.

독자들도 정지용의 「한울혼자보고」와 「병」을 차례대로 감상하였을 것이다. 이 두 시는 같은 시 같지만 다른 시처럼 보인다. 그런데 다른 시 같지만 같은 시처럼 독자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뒤적거려볼 일이다. 그것이 정지용의 작품에 다가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정지용이 「한울혼자보고」를 쓰고 발표할 당시는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가 결성되어 신경향파 문학운동을 일으키고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영국에서는 대규모 총파업이, 2차 공산당 사건으로 이준태 등 15명이 검거된다. 이렇듯 국내외의 정세는 급박하고 혼란스러웠다.
정지용의 전기에도 영향이 있었다. 이때 그는 일본 동지사대학 예과를 수료하고 영문과로 입학하였다. 또 『학조』 뿐만 아니라 『신민』, 『문예시대』 그리고 일본문예지인 『근대풍경』 등에 작품을 다수 발표하였다.


국내외의 상황과 개인사는 정지용에게 시를 쓰라고 강요하였을 것이다. 이때 정지용은 고독과 외로움의 대안으로 시를 쓰고 위안을 받는다. 고향 옥천의 누이가 해주었을 법한 빨간 병과 파란 병의 이야기. 이는 단지 민요풍의 시가 아닌 정지용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고조시킴과 동시에 삭이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후에 시문학사의 박용철이 관여한 「병」은 「한울혼자보고」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다만 “뻐꾸기 울던 날” 누나가 시집을 가버린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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