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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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는 정지용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8.11.29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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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정지용은 “1950년 7월 그믐께 집을 나간 후 소식이 없”다.
정지용의 장남 구관은 아버지 모습의 최후를 이렇게 기억하였다. 

당시 녹번동 자택으로 찾아온 “제자들과 대화를 나눈 후 옷도 갈아입지 않”고 나갔다. “문안에 갔다 온”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고 한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정지용을 찾겠다고 둘째 구익과 셋째 구인이 나섰다. 그런데 당시 아버지를 찾겠다고 나섰던 두 아들도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슬픈 일이었다. 후에 구인이 북한에 살고 있음이 확인되고, 2000년 남북이산가족 2차 상봉 때 남쪽에 살아있던 형 구관과 만난다. 그러나 둘째 구익의 안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정지용의 「향수」는 고향을 노래, 겨레의 숭고한 사상과 감정을 담고 있어 북한에서도 널리 애송되었다. 이에 김정일은 구인의 환갑에 잔칫상을 차려주며 정지용을 애국시인이라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는 구인이 남한의 형 구관에게 전한 말이다.
정지용의 고향에 살고 있는 필자는 지용제에 참석하는 구관과 자주 마주쳤다.

아버지 정지용에 대한 질문에는 항상 목소리를 높여 답변해 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필자는 쭈뼛거리느라 가까이 가서 많은 것을 여쭤보지 못하였다. 먼발치에서 구관의 소리를 조용히 들을 뿐이었다. 지나고 보니 후회스럽다.

구관은 평생 연좌제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는 보따리 장사를 하고 탄광을 떠돌았다. 그러면서 금서로 묶였던 아버지의 작품에 해금이라는 빛을 찾아주려 납북 확인을 받으러 다녔다. 관계부처에 진정을 내고 자료를 찾는데 1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정지용의 작품이 해금되기 몇 달 전, 어느 신문사 주관 시낭송대회에서 한 여고생이 「향수」를 낭송해 봉변을 당했다. 웃지 못 할 일이다. 해금되기 전 월북 시인에게 건넨 족쇄의 무게는 이렇게 힘겹고 버거웠다.

1940년대 말부터 정지용의 시가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이름도 정O용 혹은 정OO으로 표기되었다. 월북 누명을 썼기 때문이다.

1988년 정지용문학이 해금되기 전, 구관은 문학을 잘 아는 한 기자를 찾았다. 그리고 청주에 사는 그 기자와 친해졌다. 밤새 술을 마시고 울었지만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였다. 그는 기자를 붙들고 “아버지, 정지용이 빨갱이 누명만 벗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그리고 또 술을 마셨다. 그렇게 구관은 수십 년을 견뎌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던가.

장남 구관의 바람은 영혼을 담고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정지용이 오롯이 우리 곁으로 귀환하고 있음을 알렸다.

1982년 깊은샘에서 『정지용 시와 산문』을 발간한다. 그러나 납본 필증이 없어 판매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6년간 창고에 쌓아두었던 『정지용 시와 산문』은 1988년 납본 필증을 받았다. 발간해 놓고도 시중에 나설 수 없었던 『정지용 시와 산문』은 납·월북작가 해금도서 1호로 기록된다.(2016년 겨울, 종로구 깊은샘 출판사에서, 필자와 박현숙 사장의 담화 내용)
이는 사실상 정지용의 해금을 의미한다고 언론과 문화계는 받아들였다. 우리문학사 복원에 숨통을 텄다고. 그러나 당시 문공부는 ‘출판 사실 확인에 불과’하다고 맞받아쳤다. 

북한의 구인은 남한에 있는 정지용을 찾는다고 이산가족 상봉신청에 적었다. 북한으로 갔다는 정지용. 그러나 북한에 살고 있던 정지용 아들 구인이 모른다니. 이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더구나 북한에 있지도 않은 정지용을 월북이라고 한 세월을 몰아세웠으니. 그들의 슬픔과 한은 오죽하였겠는가?

여기서 현대를 사는 우리는 분명히 일정부분 빚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제강점기 우리말을 노래하며 민족의 정서를 아름다운 모국어로 구사하던 정지용을 해금이 되기 전까지 이름조차 거론하지 못하게 족쇄를 채웠다는 것. 그 족쇄를 반세기 동안 지속한 큰 빚은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난감한 좌절감이 밀려든다. 

이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정지용을 기다리던 장남 구관도 가고, 장녀 구원도 2015년 떠났다. 사실상 정지용의 자녀는 남한에 더 이상 없다. 북한에 있다는 구인의 생사 확인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도 벌써 졸수(卒壽)를 오르내리고 있다.

돌아오지 못하고 살기도 하고 돌아오지 않고 살아가기도 하는 사람들. 그들 속에서 돌아오지 않는 정지용을 기다리며 속절없이 세월을 보내고 애만 태운 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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