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의 일본 교토 하숙집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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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의 일본 교토 하숙집Ⅱ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8.12.1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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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한 여름의 별이 빛나는 하늘은 멋진 수박을 싹둑 자른 것 같다고 말하면 코다마는 천녀(天女)가 벗어 놓은 옷 같다고 말한다. 미이(ミイ)의 붉은 뺨은 작은 난로(煖爐) 같다고 말하면 코다마는 미이의 요람(搖籃) 위에 무지개가 걸려있다고 말한다. 북성관(北星官)의 2층에서 이러한 풍(風)의 사치스런 잡담이 때때로 교환되는 것이다. 그가 도기(陶器)의 시(詩)를 썼을 때 나는 붉은 벽돌(赤悚瓦)의 시(詩)를 썼다. 그가 눈물로 찾아오면 밤새 이야기할 각오(覺悟)를 한다.

「시(詩)는 연보라색 공기(空氣)를 마시는 것이거늘」이라고 내 멋대로의 정의(定義)로 맞받아쳤다.

개를 사랑하는 데 그리스도는 필요(必要)하지 않다. 우울(憂鬱)한 산책자 정도가 좋은 것이다.(중략)

다양한 남자가 모여 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외로워하는 남자 야마모토(山本)가 있는가 하면 「아아 카페 구석에 두고 잊어버린 혼(魂)이 지금 연인을 자꾸만 찾는다!」라고 신미래파처럼 구는 마쓰모토(松本)가 있다. 그는 이야기 중에 볼품없는 장발(長髮)을 멧돼지처럼 파헤치는 버릇이 있다.

어쨌든 우리들은 힘내면서 간다면 좋다. 요즈음 시작(詩作)을 내어도 바보 취급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바보 취급해서 써버리면 되지.

-정지용의 산문 「詩·犬·同人」 중에서-

정지용은 『自由詩人』 1호에 「詩·犬·同人」(自由詩人社, 1925. 12, 24면.)을 발표한다.

이렇게 정지용은 코다마와 시 작법에 대하여 논하는 “사치스런 잡담”을 하게 된다. 이는 정지용과 코다마의 친밀도가 높음을 시사하는 또 다른 표현으로 보여진다. 또한 코다마 뿐만 아니라 “다양한 남자”인 “야마모토(山本)”, “마쓰모토(松本)”도 거론한다. 아마 이들은 『自由詩人』의 동인으로 보인다.

각설하고 코다마와 정지용은 가까운 사이였다.(「정지용의 일본 교토 하숙집 Ⅰ」, 『옥천향수신문』, 2018. 12. 6, 4면 참조) 정지용의 하숙집은 코다마의 거주지와 지척에 있었다.

정지용의 산문 “「詩·犬·同人」에 등장하는 “북성관”은 『自由詩人』의 발행소인 자유시인사 편집부이자 코다마의 거주지이다. “京都市上京區市電植物園終點下ル”를 통해 동지사대학에서 북쪽으로 2km 정도 거리에 위치한 교토부립식물원 근방”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친근하였던 코다마와의 관계는 정지용 하숙집과 관련이 있었음직하다. 거주지가 가까우면 서로 만날 기회가 많았을 것이고 더 자주 내통을 하기에 용이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지용의 하숙집 주소지(김동희, 「정지용의 이중언어 의식과 개작 양상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2017, 42면)는 “1924년 예과 2년에는 “下鴨上河原六四浦上方(현주소 下鴨上川原町64 주변), 1925년 예과 3년-1927년 영문과 2년은 “植物園前ェビス館”(식물원 앞 에비스관, 현 주소는 北大路橋西詰交差点 주변, 1927년 12월에는 “上京區今出川寺町西入上ル上塔之段町四九一”(현주소는 上塔之段町490-5 주변)”이다. 따라서 정지용이 “북성관”에서 코다마와 교류할 당시인 1925년 주소지는 “植物園前ェビス館”으로 이곳 역시 교토부립식물원 근처이다. 1925년에는 교토부립식물원이 종점인 노면전차가 운행 중이었고 이 전차의 종점근처가 코다마의 거주지이고 식물원 맞은편이 정지용의 거주지이기 때문에 정지용과 고다마의 거주지는 상당히 가까웠다. 단, 해당년도에 “북성관”이라는 이름의 기숙사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건물명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코다마와 정지용은 근처에 살면서 문학적인 호흡을 같이 하였다.

한편, 코다마는 정지용의 귀국 후 끊어진 안부를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정지용의 죽음 소식을 들은 후 「「自由詩人のこと」 鄭芝溶のこと」에서 다음과 같이 애석함을 적는다.

왜인지 그이야기가 진짜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젊은 날 열혈의 낭만시인, 뛰어난 한국 유일의 학자·시인. 이러한 그가 총살되었다고 한다면, 그 장면을 나는 애처로워서 눈꺼풀에서 지우고 싶다. 그리고 전쟁을 증오한다. 이데올로기의 투쟁이 시인의 생명까지 빼앗아 가는 것을 증오한다. 그리고 보도가 어떠하든, 역시 鄭이 어딘가에서 살아있어 주기를 빌었다. 빌면서, 그 후로는 鄭에 관해서 묻는 것도 이야기 하는 것도 피하고 있다.

-「「自由詩人のこと」 鄭芝溶のこと」 중에서

이렇게 코다마는 정지용의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 한 시인의 죽음 앞에 우리는 모두 숙연하여질 뿐이다.

눈이 내린다. 골목길 눈을 쓸고, 뒤돌아서면 또 쌓여있다. 눈처럼 뽀얀 시를 쓴 정지용! 그의 시는 읽고 또 읽어도 오늘 골목길에 쌓인 눈처럼 궁금증만 더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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