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희망 전령사 「비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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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희망 전령사 「비듥이」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9.01.03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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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살아서도 슬펐고 죽어서도 슬플 정지용. 아니, 어쩌면 죽어서는 행복하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무게중심이 맞지 않는 배는 침몰을 앞두고 있다. 다만 무게중심이 맞지 않음을 선장이나 선원 그리고 승선객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 무게중심 이론은 세계의 기운이 그렇고 국가의 운명이 이와 비슷하고 지방이나 작은 단체 그리고 가정이나 개인에게도 모두 적용되는 일이다. 그만큼 범주가 크다.
때론, 정지용도 이 무게중심의 이론을 적용 받으며 일제 강점기의 슬픈 강을 건넜을 것이다.
2019년이 되었다고 새해 인사들을 주고받는다. 어제의 해는 오늘도 뜨고 내일도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뜨고 지는 시간에 대한 공간적 환경이 달라질 뿐이다. 이 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인간이다. 그 공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 자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구성원들이 조성한 혹은 조성당한 공간적 배경은 때에 따라 다르게 인간에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 조성된 공간에 항변하기도 하고 때로는 순응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처럼 무척 가혹한 환경이 주어지면 적응하는 이와 가혹함에 앞장을 서서 어떤 이익을 추구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그 ‘못 견딤’에 몸부림치며 맞서기도 하였단다. 이 ‘맞섬’은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그 위협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인마저도 곤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참 슬픈 일이다.
정지용은 이 곤궁하고 슬픈 역사의 다리를 어떻게 건넜을까?
‘문학은 현실의 반영물’이기 때문에 당시 정지용 작품을 뒤적여 본다. 그의 「비듥이」가 눈에 들어온다.

저 어는 새떼가 저렇게 날러오나?
저 어는 새떼가 저렇게 날러오나?

사월ㅅ달 해ㅅ살이
물 농오리 치덧하네.

하눌바래기 하눌만 치여다 보다가
하마 자칫 잊을번 했던
사랑, 사랑이

비듥이 타고 오네요.
비듥기 타고 오네요.
 「비듥이」 전문, 『정지용 시집』, 시문학사, 1935, 124면.

현대어로 「비둘기」인 「비듥이」는 1927년 『조선지광』 64호에 「비들기」로 발표한다. 이후 1935년 『정지용 시집』에 제목을 「비듥이」로 표기하며 재수록,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시를 최초로 발표한 1927년은 일본 교토의 동지사대학에 유학 중이었다. 유학의 실현은 정지용에게 새로운 하늘이 열렸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떠나온 고국과 가족을 그리워하여야만 하고 새로운 학교생활에 적응하여야만 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하물며 고국은 일제강점기 상태였고 정지용은 그러한 공간적 시대적 상황에서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그의 고뇌와 슬픔에게 어떤 의미 있는 희망의 메시지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정지용의 슬픔은 ‘비둘기’를 타고 오는 ‘사랑’에 응축되고 있다. 정지용은 사월 햇살이 비치는 하늘아래 화자를 세워둔다. 시적화자는 비둘기 떼가 밀려오는 모습이 마치 바다에서 큰 물결이 밀려오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 이 비둘기는 ‘사랑’을 가져올 것이기에 그 반가움이 더욱 클 것이었다.
“하늘바래기”는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에만 의존해 농사를 지어야하는 ‘천수답’의 방언이다.
「비듥이」에서 “하늘바래기”는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며 아무 일도 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늘바래기”만 하며 일제강점기의 슬픈 강을 건너고 있던 정지용은 「비듥이」를 통해 희망을 전달 받는다.
그렇게 정지용의 시대적 혹은 삶의 슬픈 고통은 「비듥이」를 통해 위로 받고 ‘사랑’이 “비듥이를 타고 오”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이처럼 마음속에 사랑의 전령사인 「비듥이」 한 마리 키웠으면 한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슬픔의 다리를 모두 건너 ‘사랑’이라는 희망 하나 가슴에 품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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