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운 마흔아홉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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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운 마흔아홉의 노래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9.04.0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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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정지용의 마흔아홉은 온통 흔들렸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어딘가에는 서있어야 했고 어딘가에는 소속되어야만 하였다. 정지용처럼 한국문학을 움직일 수 있는 유명세를 타던 인물은 더욱더……. 그의 방향 설정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정지용도 지구를 딛고 서있어야지 지구를 들고 물구나무 설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해방 후의 문학계는 사상이라는 혼란이 가중돼 비틀거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적은 일본이라는 단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방을 맞이하고 보니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적으로 존재하였다. 슬프다. 같은 민족에게 겨눈 총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가슴팍을 후벼 팠다.
정지용은 그러한 세월을 살았다. 옥천군 기자실에서 만난 연합뉴스 박 기자는 당시 “문학인들의 향유문화는 괴로움과 술이 병행하였고 그것의 결과로 병을 가져왔”다며 그것은 바로 그들을 “단명하게 만들었”다고 특유의 서글서글한 눈망울을 굴리며 농담처럼 한마디 건넨다. 그럴 수 있다. 일제의 잔재와 이념의 소용돌이가 남긴 괴로움의 잔여물이 빚은 찌꺼기에 당치도 않게 문학인들이 병들어 죽어갔다.
그 속에서 정지용이 관여하였다는 ‘조선 문학가 동맹’이 탄생한다. 일본 제국주의 잔재 소탕, 봉건주의 잔재 청산, 국수주의 배격, 진보적 민족문학 건설, 조선 문학의 국제문학과의 제휴라는 강령을 선포하며 조직된 ‘조선 문학가 동맹’. 정지용은 자의든 타의든 이 동맹의 중앙 집행 위원회의 아동문학부 위원장(행사 참여는 장남 구관이 하는 등 소극적이었다고 연구되고 있음)으로 이름을 올린다.
그러나 정지용처럼 순수 문학인이 짊어질 세계의 정세는 단순치 않았고 사상의 계열은 복잡하였다. 1946-1947년 조선 문학가 동맹의 문단 세력은 절대적 확산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고 홍명희, 홍 구, 박아지, 이태준, 오장환 등이 월북하였다. 이후 안회남, 정지용, 김동석, 설정식 등이 조선 문학가 동맹을 지탱하였다. 그러나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리고 1947년 겨울-1948년 안회남, 김동석, 박팔양, 조벽암 등이 월북하면서 조선 문학가 동맹의 아성이 무너졌다.
정부 수립 후까지 남아있던 설정식, 이용악, 박태원 등은 6·25때 월북하고 유진호, 이 흡은 지리산으로 도망가 빨치산으로 남아 있다가 사살 되었다. 그리고 정지용, 김기림은 정부 수립 후 자신들의 문학에 새로운 전환을 시도하였으나 6·25 당시 납북 당(권영민 편저, 『한국문학50년』, 문학사상사, 1995, 444-454면.)하였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많은 궁금증을 유발하며 그에 따른 수많은 가설을 생산하고 있다. 남북의 문화교류와 왕래가 자유롭다면 또 다른 증빙 자료들이 발견·첨가되어 바른 문학사의 정립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정지용은 그가 맞이한 마지막 해(우리가 잠정적으로 그렇게 정리해 알고 있는)에 「倚子」라는 시를 발표한다. 이 시는 인생의 황금기였던 청춘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때로는 고요하게, 이따금 황량하기 그지없게.


앉았던 자리
다시 채워
남는 靑春

다음 다음 갈마
너와 같이 靑春

(중략)

香氣 담긴 靑春
냄새 없는 靑春

비싼 靑春
흔한 靑春

고요한 靑春
흔들리는 靑春

葡萄 마시는 靑春
紫煙 뿜는 靑春

(중략)

아까
네 뒤 딸어
내 靑春은
아예 갔고
나 남었구나
     - 『彗星』 창간호, 1950, 32-33면

이렇게 ‘청춘’마저도 믿고 싶지 않았던 세월과 흔들리던 청춘. 그 속에 유린당했던 정지용의 서러운 시간은 냉동된 채로 역사 속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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