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지도자 한명이 전국을 뒤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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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의 지도자 한명이 전국을 뒤흔들다
  • 임요준기자
  • 승인 2019.04.11 1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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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 불모지 옥천을 전국 1위에 올려
‘건강도시 옥천’ 전문가 의견 경청해야
배구계 전설 천상구 전 교사가 1980년 전국을 제패하고 선수들에 둘러싸여 헹가래를 치는 사진을 들고 기뻐하고 있다.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지만 훤칠한 키에 자상한 얼굴은 손자의 어떤 어릿광도 ‘허허’하며 웃음으로 받아줄 듯한 다정스런 할아버지. 평생 체육교사로 헌신하는 동안 집안 내조자께서 알뜰살뜰 한평생 모은 돈으로 건물 하나 마련했다며 껄껄 웃으시는 모습이 천진스럽기까지 하다. 옥천읍 먹자골목에 자리 잡은 한 3층 건물에서 만난 배구계 전설 체육전문인 천상구(77) 전 교사의 모습이다. 천 전 교사는 동이면 지양리에서 아버지 천오조님과 어머니 박춘년님 사이에 1남3녀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인 구영자(76) 여사 사이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천 전 교사는 배구 불모지 옥천에서 중학교 때 클럽활동으로 처음 배구를 시작했다. 육상으로 다져진 순발력과 큰 키는 당시 체육선생님의 눈에 띄는데 충분했다. 중3때 시작한 배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체육교사로 부임하면서 엘리트 선수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밑바닥부터 시작한다는 각오로 선수 한 명 한 명을 때론 친구처럼, 때론 형님처럼, 때론 엄한 아버지가 되어 애지중지 기른 아이들이 전국을 제패했다. 그때의 환희는 40여 년이 다 된 지금 회고해도 저절로 흐뭇해진다. 옥천체육이 발전하고 ‘건강도시 옥천’을 만들기 위해선 무엇보다 체육정책을 수립하는 단계에서부터 전문가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 전 교사가 그리는 ‘건강도시 옥천’을 담았다.

- 60년 전 옥천에서 배구는 생소할 것 같은데 시작하게 된 계기는요?
어려서부터 키가 컸어. 초등학교 땐 100m와 400m 계주 선수였지. 군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어. 중학교 때 중단했어. 동이면 지양리가 고향인데 동이초등학교를 나오고 옥천중학교 3학년 때 배구클럽에서 처음 접했다. 키가 크다는 이유 하나로 체육선생님이 추천해 주셨지. 당시만 해도 선생님께서 하라면 무조건 따라야 했거든. 이게 계기가 되어서 옥천상고 때에는 남부3군 체육대회에 학교 대표로 출전했고 충북대 체육학과에 배구 특기자 전형으로 입학을 했지. 청주공고에서 유일한 라이벌인 청주대와 매년 경기를 했는데 매번 이겼다.

- 졸업 후 실업팀은 왜 안가셨나요?
원래 내 목표는 체육선생이 되는 거였어. 처음 발령지가 보은 원남중학교였어. 1년 만에 청산중학교로 왔지. 시골아이들인데 신장이 좋더라고...배구부 창단을 하고 도 대회 출전했는데 중간정도 성적을 거뒀지. 그러더니 갑자기 옥천중학교로 발령이 났지. 무슨 일인가 했더니 삼양초 배구팀이 성적이 좋았는데 이 아이들이 옥천중으로 진학했는데 배구를 가르칠 체육선생이 마땅치 안 했던 거여. 정기인사 때도 아닌 4월에 발령이 난거지. 가서 보니 배구선수들에게 축구를 시키고 있더라고...이게 싫다며 아예 학교를 그만둔 아이도 있었지. 가가호호 방문해서 다시 모집하기 시작했지. 여섯 명이 모였어. 동이 청마리에 이구연 학생이 있었는데 이 아이를 만나러 가는데 겨울 강물이 꽁꽁 얼어 얼음을 타고 간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 이 녀석이 나를 보더니 큰절을 하더군. 3일을 고민하더니 배구를 하겠다고 해 재입학을 시켰고 드디어 일곱 명이 모였지.  

- 그렇게 해서 옥천 엘리트 배구가 탄생했군요. 이후 어떻게 되었나요?
아이들이 1학년 때 시작해 1년 후인 2학년 때 서울에서 열린 전국소년체전에서 동메달을 땄지. 옥천상고가 당시엔 옥천공고였는데 이 아이들이 입학하면서 도교육청에서는 배구학교로 지정했다. 도시 학교는 코치와 감독이 있었지만 열악한 우리 학교는 나 혼자서 다 했다. 그럼에도 전국대회 출전해 우승했다. 1980년 KBS, MBC, TBC 방송3사에서 개최한 대회 모두 휩쓸어 3관왕에 올랐다. 날짜도 잊지 못하는 5월 27일. 서울 장충동에서 광주여상과 숙소를 같이 사용하고 있었는데 남자부는 우리가, 여자부는 광주여상이 결승에 올랐다. 갑자기 경찰이 뺑 둘러싸 이상하다 생각하고 경찰인 고향 후배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국가 비상사태라고 말하더군. 강원도에서 열릴 전국소년체전도 무산됐다. 5‧18 사태가 일어났던 거여. 광주여상은 결승전을 포기하고 내려갔고 경찰들이 둘러싼 상황에서 경북사대부고와 싸워 우승했다. 당시 변웅전 아나운서가 나에게 3역을 한다고 방송에서 말하더군. 무에서 유를 창조한 거나 다름없었지. 초등학교 때부터 관리된 아이들이 잘 다져져서 대학까지 보내졌다. 한양대 등 여러 대학에서 스카우트 작전이 들어왔어. 그래도 이 아이들을 체육교사로 만들겠다는 신념이 있어서 스카우트 작전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했지. 그때 아이 중에는 지금도 제천고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광태라고 하는데 외숙이 중앙정보부 직원이었어. 대통령배 우승했을 때 외숙이 초청해 신촌으로 갔다. 이 아이를 서울대에 보내겠다고 하더군. 내가 말했지. “단체운동은 뿔뿔이 짜개서 보내면 안 된다. 팀별로 묶여서 해야지 안 그러면 다 죽는다. 충북대 보내면 체육교사라도 할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의 부모도 내 의견에 따라줬고 열세 명 모두 체육교사가 됐다. 이때 실업팀에서 한 명당 2백만 원씩 주고 데려갔는데 이걸 받아들였으면 벌써 건물주 되었을 텐데(하하하)...셋방살이 13년 만에 겨우 하나 마련했네. 아이들 대학 진학 시키고 배구에서 손을 땠다. 이후에 이원 출신 투창 종목 이영선 선수를 초등학교까지 지도하고 청주 금천중학교에 진학시켰다. 엘리트 체육은 여기까지다.

- 김세진 전 감독과는 어떤 인연인가요?
옥천공고 선수들을 지도할 당시 옥천중학교 강당은 삼양초, 옥천중, 옥천공고 초중고 선수들이 모두 모여 연습하던 장소였어. 세진이는 내가 직접 가르친 제자는 아니고 당시 모두 모여 운동하는 상황에 간접적으로 지도한 제자다. 세진이는 고등학생이 되더니 키가 무척 자랐더군. 초등학교 때는 포지션이 세터였다가 고등학교 때 공격수로 바뀌었다.

- 정년퇴임 후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그라운드골프를 즐기고 있다. 군 협회장 7년을 하고 도협회 심판위원장을 했다. 중앙회 조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군 협회장 때 도에서 개최한 전국대회에서 우승했다. 2010년 부산에서 열린 전국대회에서 아내는 개인전에서 우승했다. 대학 때 탁구를 한 경험이 있어 라지볼탁구도 즐기고 있다.

- 지금 옥천의 체육실정은...
엘리트와 생활체육이 통합된 지 4년 됐다. 나는 엘리트체육만 하다가 퇴임 후 생활체육에 들어와 봉사적인 생각으로 참여하고 있다. 봉사라 생각하지 않으면 생활체육은 안 된다. 봉사정신으로 해야 한다. 시설 면에서 옥천은 타 시군에 비해 잘 돼 있다. 그라운드골프장이나 게이트볼장도 그렇다. 하지만 정식 규모는 아니다. 임시로 급하게 만든 것이다. 옥천 체육이 발전 하려면 이곳 인근 산 정지작업을 해 수영장, 청소년수련관 등과 함께 하나의 스포츠타운을 조성해야 한다. 건물 하나를 지을 때 미래를 내다보고 해야 한다. 관성회관도 그랬어야 했다. 지금 관성회관은 회의나 잠깐 하고 만다. 그 외 효율적 공간이 못된다. 다목적회관으로 했어야 한다. 건물 하나를 세우더라도 전문인 자문을 받아야 한다.

- 옥천체육 발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생활체육과 엘리트체육이 통합됐지만 서로 연계성 있어야 한다. 배구도 초‧중‧고가 연계되닌까 옥천고 배구 출신들이 프로에 진출한다. 상호 연계되어서 해야 한다. 그래야 도민체전도 우승할 수 있다. 제천이 그 좋은 예다.
군 체육회에 운영위원회가 있다. 거기서 좋은 안건 나와야 하고 체육회는 전문가 자문을 받아서 해야 한다. 젊은이들의 자문도 얻어야 한다. 나이 먹었다고 에헴하는 습관은 버려야 한다. 생활체육에 27개 클럽이 있다. 이들에게서 수시로 자문 받아야 새로운 아이디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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