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 이 길만이 내 길 ‘이혜진’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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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 이 길만이 내 길 ‘이혜진’ 교육장
  • 도복희기자
  • 승인 2019.05.23 1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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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 세월 오직 교육자의 길 걸어
아이들이 좋아하는 교사되길 노력
삶의 철학 ‘이 순간 최선 다하자’
퇴임 후 수필가 이혜진으로 남길

옥천교육지원청 이혜진 교육장은 전남 완도가 고향이다. 8남매 맏이로 태어나 스스로 바로 서야 동생들이 따라올 거라는 책임감이 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옆 반 여선생님이 너무 예뻐 크면 예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 이후로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목포교육대학교, 청주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1977년 목포 용호초 교사를 시작으로 교직에 들어선 뒤 1979년 충북 두산초, 상야초, 동화초, 한전초, 진천상산초, 흥덕초, 내수초, 상봉초 교사를 거쳤다. 1999년 청주교육지원청 장학사, 옥천교육지원청 교육지원과장, 2004년 남평초, 수곡초 교감,  2008년 판동초, 수곡초 교장, 충북도 교육청 체육보건급식과 장학관, 충북도교육정보원 원장을 거쳐 옥천교육지원청 교육장까지 42년 6개월을 교직에 몸 담아왔다. 올 8월 퇴임을 앞두고 있는 이 교육장은 “교단에 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달려왔기에 아쉬움은 없다”며 “40년이 4년처럼 지나가 버렸다”고 지나간 시간을 회고했다. 42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교직자로서 걸어온 이 교육장의 삶과 가치관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 주


△ 잊혀지지 않는 학생이 있다면
상봉초등학교 2학년 담임을 맡고 있을 때다. 특수반 아이였다. 출석을 부르는데 도통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이 애는 대답을 안해요”라고 해서 “아니야 속으론 대답을 할거야”라고 하니 어느 날부터 빙긋이 웃던 아이다. 그림을 잘 그리던 아이였다. 그림을 액자에 넣어 교실 한쪽 벽에 걸어놓으며 “김기창 화백보다 더 유명한 화가가 되어 ‘TV는 사랑을 싣고’에 나와 선생님을 찾아 줄래”라고 말했던 그 아이가 기억난다. 청년이 되었으면 어디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장학사가 되어 학교를 떠나오고 얼마 있다가 화장품 판매를 하던 어머니와 아이가 손을 잡고 교육청으로 찾아왔다. 눈물이 났다. ‘연구학교 시범발표’ 하는데 그 학교에 간다고 하니 그날부터 교문에 나가 기다렸다고 하는 아이. 담임을 맡았던 아이들에게 초코렛 선물을 하는데 “특별히 네가 예뻐서 한 상자 더 주는 거야”라고 했더니 너무나 천진하게 기뻐하던 그 아이가 제일 생각난다. (이 교육장은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며 먼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 어떤 교사가 되고 싶었는지
아이들의 숨결을 느끼고 눈 맞추며 숙제 검사를 하고 일기 검사를 하던 그 시절이 제일 행복했다. ‘가장 좋은 교육환경은 선생님의 모습’이다. 학생들은 선생님과 동일시하고 싶어 한다. 저도 3학년 때 옆 반 여선생님을 바라보고 그분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던 것처럼 어떤 아이들은 제 모습을 보면서 또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교단에 설 때는 항상 웃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으려고 노력했다. 누구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학생들은 앞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을 바라본다. 선생님을 좋아하면 인정받고 싶어 숙제도 잘해 오고 가르침을 스폰지처럼 흡수한다. 선생님은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다. 늘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 교직생활을 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시골학교 담임으로 있을 때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러 뒷산에 가곤 했다. 으름, 머루, 다래가 지천으로 있었다. 과일을 따와 제일 잘 익은 것으로 갖다 주던 그 동심이 눈물 나게 그립다. 산자락 밑에서 도화지를 펴놓고 그림 그리던 아이들의 작은 손이 참 보고 싶다. 행복한 교직생활이었다. 한 번도 잘못 들어선 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길 만이 내 길이란 생각으로 앞만 보고 달려왔다. 한 가정에 두 아이 엄마로서 아이들 운동회나 소풍에 한 번도 따라  가본 적이 없다. 당연히 아이들 행사에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 교직자로서 양심이 허락지 않아 갈 수가 없었다. 소풍이나 운동회 때마다 내 아이들에게 “엄마가 맡은 아이들을 두고 너희들을 따라가면 선생님 없이 지내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어”라고 설득해야 했다. 할머니, 이모, 고모와 찍은 사진만 있는 자녀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다. 그 아이들이 자라 둘 다 선생님이 되었다. 큰 딸은 두 아이를 낳은 지금까지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있으니 엄마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정보다 학교 아이들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교육자로서 최선을 다해온 시간이었다. 매 순간 충실했기에 퇴임을 앞두고 교직자로서는 아쉬움이 없다.

△ 평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자세는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할 수 없는 일이다. 책무가 주어지면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봄을 만끽해라 오는 봄은 지나간 봄과는 다르다’라는 생각으로 항상 그 시간에 맡은 것을 열심히 한다. 나중에 ‘~하면’이라고 미루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충실하려고 몸도 마음도 단련하며 살았다. 당연히 만나는 이에게도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마주치는 그 순간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건 순간순간의 만남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동료든 직장 상사든 후배든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한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내 삶의 중요 원천이다.

△ 임기 후 계획은
한때 시와 수필 쓰기를 즐겨했다. 충북 글짓기 회원으로 활동하며 창작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동안 여유가 없어 잠시 손을 놓고 살다보니 지금은 글 한 편 쓰는 게 쉽지 않다. 퇴직 후 여유가 생기면 글을 다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퇴직 후 미뤄둔 여행을 마음껏 하면서 여행지에서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 싶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꽃과 바람과 풀 한 포기에 담긴 사연들에 귀 기울이는 시간, 기대된다. (이혜진 교육장은 1993년 ‘수필과 비평사’에서 수필부문으로 등단하고 2000년 수필집 ‘행복찾기’를 출간한 수필가이다.)

△ 학부모에게 남기고 싶은 말
젊을 때는 모든 아이의 개성을 동일시하는 실수를 범했다. 학업 성취 잣대 하나를 두고 모든 아이들을 평가하는 것이 잘못된 사고임을 깨닫고, 한 명 한 명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을 하니 모든 아이들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웠다. 학부모들도 우리 아이의 개성과 소질을 잘 파악해서 잘하는 것을 키워주고, 잘하는 것이 보이지 않을 때는 천천히 기다려주는 느긋함이 필요하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이 아이들의 교육은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한 가정만이 아닌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미래의 주역으로서만이 아니라 현재의 주역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이 자기 삶의 주인임과 동시에 당당한 시민으로 행복을 찾아갈 수 있도록 지역사회와 함께 배움의 공간을 열어주고 힘찬 응원을 보내야 할 때다. 한 명의 아이도 소외되지 않게 우리 모두의 아이라는 생각으로 학부모님 모두 한 마음으로 아이들의 마을 선생님이 되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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