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 나타난 민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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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 나타난 민구 아버지
  • 강병철 수필가
  • 승인 2020.12.03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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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구야, 너는 느이 아버지를 닮지 마라. 이.” 조 선생님은 수업 도중 가끔씩 민구를 바라보다가 갸웃거리며 그 말을 던졌다.
̒히이' 민구는 멋쩍은 웃음만 지을 뿐 말대꾸는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나, 집안 얘기에는 일체 대꾸하지 않는 단단한 체질로 바뀌는 중이다. 
“느이 아버지는 아무도 못 이겨. 나 혼자만 이길 수 있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조 선생님은 달리기건 덤블링이건 모두 잘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문이 드르륵 열린 것이다. 웬일일까? 민구 아버지가 휘청거리며 교실로 들어온 것이다. 불콰하게 풍기는 술 냄새 뒤로 새빨간 철쭉꽃이 화사하다.


“나유” “웬일여?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천상 양반은 아니구먼.” 조 선생님은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싫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란 말유. 내가 노름 했으면 논문서를 품었겠소? 집을 저당 잽혔겼소? 젠장, 논이 있어야 논문서라두 품지. 까짓 겉보리 두어 말 가지구 그래 사람을 유치장에 집어는다구 으름장 놓는단 말여? 내 나이 마흔에…그래…조오기 코끼리 같은 자식도 있는데 새파란 애기순사한테 으더 맞게 생겼느냐구?”
민구 아버지가 책상을 뻥 치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콧방울이 덜렁거려 아이들 모두 책상에 엎어져 터지는 웃음을 간신히 참는 중이었다.


“가” 조 선생님이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 말이 뭐가 틀렸느냔 말유. 같은 풍양 조(趙)씨 양반 가문찌리 터 놓구 얘기헙시다.”
“약주 한 잔 하셨으니 그만 집으루 돌아가시게. 한심 푹 주무시구 나먼 멀쩡허게 깰 것 아님감? 왜 핵교 와서 시빈가. 애덜 앞에서.” “시비. 그렇지. 시비하는 거요. 옳구 그른 것을 시시비비 따지잔 말입니다. 핵교 선상님덜이 옳구 그른 시비를 갈치는 거니께.” “틀렸다는 얘기가 아녀. 그만 하자는 얘기지. 옮은 얘기허능 것이 꼭 옳은 것은 아니잖남.”“사람 후려쌔리구 미안하다먼 끝이래유?” “왜 나보고 그래. 때린 사람한테 가서 따져야지.”
조 선생님이 달래는 목소리로 말하자 민구 아버지도 목소리를 조금 낮추는가 싶었다. 그러더니, “노래 하나 허까유.” “왜 이러셔?” “잘 할 수 있슈.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그렇지 얘덜아!”
“아니유~!” 아이들이 합창으로 대답했다.
“덱끼. ‘섬마을 선생님’이 왜 생긴 줄 알어? 이런 화창한 오후에 불르라구 맹근 거여.”
민구 아버지는 주먹을 치켜들며 때리는 시늉을 하였다. 아이들은 배꼽을 잡으며 더 크게 웃었다.

그때, “가유!” 누군가의 외침에 웃음소리가 뚝 끊어졌다. 민구였다. 민구가 소리 지르며 책상에 고개를 처박았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민구 아버지의 얼굴이 짐짓 빨갛게 달아 오르다가 다시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야중에 보시오. 우리 민구가 출세합니다. 야중에 출세해서 면장이건 지서장이건 한 자리 꿰찰테니 두고 보슈.” “출세허먼 축하해 주지. 누가 배 아퍼하남?” “두구 보랑께유.”
“글세 잘 안다닌까. 그러니까 그만 가시지. 수업 중이니까. 교장 선생님이라도 오면 큰일이여.” “아, 교장. 교장 좋다. 우리 아들 교장 시키먼 되겄다. 아, 우리 아들 교장 시켜서 나두 폼 점 잡아. 앵경 쓰구 단장 집구 여봐라, 교장 아버지다. 아하하. 교장보담 한 계단 높은 교장 아버지다. 허허, 어르신네 나가신다. 배 쑥 내밀고 에헴톨톨 해야지.”
“아저씨, 민구는 중국집 이다바 헌대요.” 아이들은 이 돌출된 상황이 마냥 즐거운 모양이다.


“뭐?” 쿵. 하하거리던 민구 아버지가 고개를 홱 돌리자 그야말로 ‘쿵’하는 소리가 나는 것처럼 아이들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아주 잠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민구 아버지가 찌푸린 얼굴로 민구를 쏘아보았다. “조민구. 진짜여?”“예스.” 민구가 허리를 딱 편 채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민구 아버지 얼굴이 다시 환하게 풀렸더니. “좋다. 그러닝께 내 새끼지. 아다바먼 워떠냐. 씩씩허게만 자라다오. 하하하하”
그러더니 ‘빠이빠이’하며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도 덩달아 ‘빠이빠이’하며 손을 흔들었다. 철쭉꽃 그림자가 흔들리며 그의 어깨를 물들여 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모두 다시 책을 잡았다. 민구도 고개를 숙이고 산수 문제를 푸는 중이다. 산수공책 첫 장엔 ‘이 공책은 누나가 나보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사 준 것이다’ 그렇게 적혀있었다.
나는 그 문장을 보면서 가슴이 철령 내려앉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민구 누나는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고향 집에 매달 삼백 원씩을 보내 준다고 한다. 추석때는 주인집에서 입던 스웨터나 운동화까지 한 보따리 가져와 옷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그 누나가 바로 민구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바로 열여섯 살 조옥자 누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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