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손녀의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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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손녀의 연가
  • 배정옥수필가
  • 승인 2020.12.1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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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하루, 한 달, 일 년 삶의 틀이 정리 상자의 마지막 칸에 들어섰다. 마지막 달 12월의 며칠 남지 않은 아주 작은 이 여백을 무엇으로 채울까? 
마지막 잎새마저도 다 떨군 나목들이 수척해져 있다. 그 위에 걸린 까치둥지마저도 허전하다. 산등성에 걸터앉아있던 꼬리만 남은 햇볕이 일년 내내 숨 기쁘게 달려온 자국들을 뒤돌아보며 삭은 한숨만 내려놓고 다소곳이 입을 다문 채 자락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까르륵 까꿍 까꿍”


눈만 마주쳐도 벙긋벙긋 소리만 들려도 생긋생긋하던 손녀딸이 벌써 여섯 살이 되었다. 
 그러니까 10월 하순,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던 어느 가을날이다. 산등성에 반쯤 허리가 꺾인 햇살이 걸터앉아 있었다. 벽에 걸린 달력에는 지난 계절에 푸르렀던 이파리들이 마냥 세월을 뒤적이고 있다. 삭히지 못한 바람에 등 떠밀린 꽃말들은 채색되어 세월의 행간에 그리움으로 고여 있다. 한 해를 돌아보니 코로나19로 우울하고 불안했던 날도 있었지만 기쁘고 행복했던 날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얼마 전에 가까이 사는 딸과 손녀를 오랜만에 만났다. 주말도 아닌 평일에 만나는 것은 아마도 두 번째인 것 같다. 서로 직장 관계상 특별한 날 아니고는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다. 내가 하는 일 형편상 주말보다 평일에 놀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내 휴일에 맞춰 딸이 연가를 낸다고 전화가 왔었다. 약속 시각에 맞춰 정소에 나갔다. 그런데 그 시간이면 어린이집에 있어야 할 여섯 살짜리 손녀가 같이 나왔다. 
“아니 오늘 어린이집에 안 갔어?”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손녀는 반가운 표정으로 꽃처럼 활짝 웃으며 “할머니 수아 안 보고 싶었어요?” 하며 양팔을 벌리고 내 품으로 파고 든다. “할머니도 당연히 보고 싶었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딸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엄마, 수아도 연가 냈대요.” “뭐? 뭔 연가야?” 내가 아이를 꼭 안아주며 물었다. “할머니, 수아도 어린이집에 말해서 연가 내 달라고 했어요.”라며 당당하다는 표정으로 우쭐댄다. 


사연은 다음과 같다. 딸인 애 엄마가 어제 저녁에 엄마 휴일에 맞춰서 연가를 냈다며 만나자고 통화하는 말을 들었단다. 그때부터 속상하다는 듯 한숨 섞인 소리로 “엄마, 수아도 연가 내면 안돼요?”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섯 살짜리 아이치고는 영민해서인지 필요할 때면 어른처럼 눈을 보며 차분하고 조용한 어조로 부탁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큰아이들에게 배워서인지. 아님, 급변하는 현시대에 맞춰 아이들 생각도 빠르게 발달 되는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을 어안이 벙벙하게 하는 일들이 다반사라 한다. 


 요즘 연가는 좋은 제도인 것 같다. 직장에서 공휴일, 병가 등 상관없이 정신적, 육체적 휴양을 취하여 생산성과 효율적 능률을 유지할 수 있게 하고 사생활을 돌볼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는 제도를 연가라 한다는데 복지 향상에 좋은 제도인 것 같다.


우리는 손녀의 양손을 나누어 잡고 오랜만에 점심을 먹고 공원으로 가을맞이를 갔다. 쪽빛 하늘에 흰 구름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눈길 닿는 곳마다 노랗고 빨간 채색으로 세상이 온통 유화의 그림을 그려놓은 듯하다. 이 아름답고 멋진 가을이 오래 머물러 있었으면 좋으련만, 곧 가을도 깊어지고 낙엽 따라가리라. 


 머지않아 축복 같은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으리라. 그 겨울이 지나면 곧 봄이 오고 마른 가지에 물이 오르고 새싹이 돋고 꽃도 피리라.


생각에 잠겨있는 나에게 손녀는 노을보다 더 빨간 단풍잎을 한 아름 던진다. 자식이 있어서 용기를 얻고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딸과 손녀의 연가 덕분에 모처럼 달콤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세상 구석구석에서 아우성만 넘쳐나는 요즈음, 참으로 신선한 일이 아니던가. 자라나는 꿈나무들만이라도 맑고 밝게 자랐으면 좋으련만. 


 어여쁜 수아야, 언제나 맑고 힘찬 가슴으로 더 넓고 더 크고 더 깊은 푸른 하늘 닮아 보아라. 백합처럼 나리꽃처럼 수선화처럼 네 향기로 온 세상 가득가득 채우거라. 밤하늘 헤아릴 수 없는 별빛으로 온 세상을 밝히는 우주를 품어 안는 꿈을 가지거라. 사랑하는 우리 손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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