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을 구하려다 순국한 의병장 이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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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구하려다 순국한 의병장 이득남
  • 오현구기자
  • 승인 2021.06.1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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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당시 험천 전투가 벌어졌던 동막천 일대
병자호란 당시 험천 전투가 벌어졌던 동막천 일대

군자감주부 이득남의 본관은 전의이씨로서 자는 자술(子述)이다. 그는 선조 32년인 1599년 옥천의 장천(長川)마을에서 아버지 지영과 어머니 영산김씨 사이에서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준수한 체모에 명석했으며 힘이 세고 도량이 있고 담대했다. 25세에 무과 급제하니 그해가 바로 인조 3년인 1624년이었다.

11년이 지난 후 인조 14년인 1636년 12월 초 청나라 태종이 십만 대병력을 몰고 조선을 침공하면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충청감사 정세규는 그 해, 12월 18일에야 근왕의 명을 받고 남한산성이 청나라군에게 포위됐다는 위급한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충청감사 정세규는 각 읍의 수령들에게 근왕병을 모집해 공주로 집결토록 했다. 칠천여 명의 군사가 확보되니 충청병사 이의배를 선봉장으로 삼고 12월 25일 공주를 출발해 남한산성에 집결토록 명한다. 그리고 충청감사 정세규는 이성현감 김홍익, 남포현감 이경, 옥천 의병장 이득남 등과 함께 뒤를 따랐다.

다음 해 1월 2일 이들 근왕병은 남한산성 남쪽에서 사십여 리 떨어진 험천현에 진을 치고 남한산성 내의 주상 호위군과 연락을 취하려 했다.

이때 청나라군은 산성주위를 포위하고 성벽을 향해 공격하고 있었다. 이 청군이 남한산성의 동서남북지점에 매복하고 험천현에서 산성 쪽으로 진군하는 근왕병의 통로를 봉쇄하고 있었다. 이 근왕 원군을 암암리에 정탐한 청장 액부양고리가 군사를 이끌고 근왕군이 주둔한 험천현을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육박전이 전개됐다.

근왕군과 의병단은 청군의 기마 정예군을 맞아 수차례 격렬한 전투를 감행했다. 싸우고 싸웠으나 열세였다. 오랑캐 군의 선공을 당한 근왕군 이천여 병사는 중과부적으로 김홍익, 이경의 두 현감과 근왕군졸 일진은 의병장 이득남과 같이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다. 때는 바로 인조 15년 (1637년) 1월 2일 밤이었다.

험천 전투가 벌어진 험천현은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과 용인시 수지구의 경계를 이루며 탄천으로 합류하는 동막천 일대를 가리킨다. 1636년 청나라 태종이 조선을 침략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으나 곧 산성 주변을 포위당한다. 당시 충청감사 정세규는 근왕병의 명을 받고 8천여 병사를 모아 가장 먼저 남한산성으로 진격했으나 험천현에 이르렀을 때 매복한 청나라 군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전원 순국했다. 험천 전투의 패배에 대해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에서는 ‘수천 명의 충청도 근왕병 시체가 험천에 쌓여 그 피가 수십 리까지 이어져 말이 나아가지 못할 정도로 참혹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전투에서 순국한 의병장 이득남은 군자감주부라는 훈공을 받았다. 살아있는 가족에게도 명예와 훈작이 수여됐으며 가솔에게는 나라에서 옷감과 식량을 지급해 생계를 도왔다.

2005년 전의이씨 종중에서는 후손들이 힘을 합해 나라를 위해 순국한 의병장 이득남의 묘역에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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