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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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0)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6.17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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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내가 합격해야 할 이유가 너무나 많기에 꼭 뽑혀야 했다. 필기시험은 국어, 산수, 사회, 자연 4과목이었다. 4과목 시험을 마친 오후에는 하얀 백지 한 장에 ‘너의 하루 일과표를 그려보라’는 문제가 주어졌다. 나는 이 문제가 하루 24시간을 얼마나 짜임새 있게, 또 중요한 일의 성격에 따라 시간 배분을 할 줄 아는 능력을 보기 위한 문제로 파악하고 중요도에 따라 시간 배분한 일과표를 그려 제출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시간의 시험이었다. 역시 큰 도화지 한 장씩을 나눠주면서 시험관은 칠판에 문제를 써내려갔다.

‘닭을 상상해서 그려라’

시험문제를 보고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고 잘못하는 것이 그림 그리기인데, 하필 그리기가 장학생 시험에 나오다니!

마음속으로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 한참 동안 아무런 엄두가 나지 않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험감독 선생님이 가만있는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 같아 그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도화지를 보면 도저히 그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 도화지 오른쪽 아래 구석에 닭을 그리는 시늉을 했다. 도화지 한구석에 조그맣게 그려놓은 그림은 내가 봐도 닭도 아니고 새도 아니고, 정말 형체를 알 수 없는 희한한 그림이었다. 한숨만 나왔다. 축 늘어진 채로 희망 없는 도화지를 제출하고 나왔다.

다음날은 면접시험이었다. 도 장학사 다섯 분이 나란히 앉아 계신 앞에 내가 앉았다. 한 장학사께서 먼저 말씀하셨다.

“너는 시험은 잘 봤는데…. 그림이 좀 이상하구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네가 그린 닭을 보니 닭에 벼슬도 없구나. 세상에 벼슬 없는 닭도 있다니? 그리고 또 너는 닭을 도화지 가운데에 그리지 않고 한구석에 조그맣게 그려놓아 구도도 맞지 않고….”

나의 약점을 정확하게 짚어내셨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서 내가그림을 잘 그릴 줄 몰라서 그랬다고 그 장학사 말씀을 인정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지금은 그리기 시험시간이 아니고 면접시험 시간이니 정신 차려 현명하게 대답을 잘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제가 닭으로 보면 병아리에 불과하잖아요? 어린 병아리에 벼슬 있는 것 보셨나요? 그리고 엄마 닭이 아니고 아가 병아리니까 구석에 조그맣게 그리는 게 구도에 더 맞다고 생각했어요.”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장학사 다섯 분이 일제히 무릎을 치며 박장대소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네 말이 맞는구나.”

“틀림없이 그림은 잘못 그린 그림인데, 고 녀석 대답 한번 기막히구나.”

장학사 선생님 말씀이 내 귓전을 스쳤다. 면접시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절망보다는 희망이 보였다. 그것으로 막연한 기대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장학생 발표가 있던 날,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선생님 앞에 섰다.

“네가 장학생으로 뽑혔단다. 정말 큰일 해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새가 되어 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어서 선생님이 한마디를 더 하셨다.

“면접시험에서 네가 만점을 받았더구나.”

엉망으로 그린 닭으로 만점을 받다니,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 같은 보람으로 더 기쁘고 내 자신이 신통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학교를 나와 집으로 달렸다. 빨리 집으로 가서 어머니께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달렸다.

“엄마, 나 국가장학생에 뽑혔어.”

벗겨지지 않은 신발 한쪽을 신은 채 뛰어 들어갔다. 평소에 말수가 없으시고 100점을 맞아도, 1등을 해도 늘 빙긋이 웃기만 하시던 어머니도 크게 기뻐하셨다.

“아이고 우리 지호 정말 큰일 했구나.”

어머니의 기뻐하시는 모습에 내가 큰 효도를 선물한 듯싶었다. 우리를 키우고 가르치느라 항상 근심 걱정 많은 어머니 얼굴에 웃음꽃을 드렸으니 기쁨이 두 배가 되었다. 며칠 후 전교생 앞에서 장학증서 수여식이 있었다. 김영성 교장 선생님은 내가 학교를 두 번이나 크게 빛낸 학생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때를 두고 어머니는 나중에 내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1등으로 합격했을 때보다 국가장학생이 되었을 때가 더 기뻤단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생각하신 것은, 아마도 내가 입시 수석합격으로 이미 3년간 사친 회비는 학교에서 면제받았으니 3개월마다 12,000환씩 3년간 지급되는 국가장학금은 전액 생활비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100환이면 소풍 한 번 갈 수 있는 화폐 가치가 있을 때였으니, 3개월마다 받는 12,000환은 큰돈으로 우리 집 살림에 크게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내가 착하고, 공부 잘하고 생활비까지 갖다 주는 드문 효녀라고 소문이 났다. 그때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우리 집 앞을 지나던 한 스님이 장독 옆에서 놀고 있는 나를 보고 어머니께 하셨던 말씀이었다.

“따님이 머리가 아주 비상해서 나중에 공부를 뛰어나게 잘할 테니 두고 보시라.

보결로 들어간 테니스부에서 전국체전 선수가 되다

국가장학생이 되면서 중요한 세 가지 목표가 달성되었다. 장학생이 된 것도 좋았지만 그 세 가지를 이룰 수 있어서 오히려 더 기뻤는지 모른다. 우선 어머니께 효도할 수 있었고 테니스부원의 꿈을 이루고 학교의 명예를 또 한 번 높였다는 성취감이었다. 나는 당장 박희태 선생님을 찾아 테니스장으로 갔다. 나를 본 선생님이 먼저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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