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아리랑
상태바
옥천아리랑
  •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21.07.27 16: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족의 문화

아리랑의 유래와 현재

아리랑은 구전으로 전승되며 재창조되어 온 우리 민족 고유의 민요다. 대한민국 무형문화재이며 인류가 보존해야 할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있다. 

아리랑은 ‘아리랑…’ 또는 ‘아라리…’ 및 이들의 변이를 여음(후렴 또는 앞소리)으로 지니고 있는 일군(一群)의 민요로 아리랑이라는 명칭은 이들 여음에서 비롯하고 있다. 

아리랑은 전국에 고루 분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널리 퍼져 있어서 이른바 ‘독립군아리랑’을 비롯하여 ‘연변아리랑’ 등의 이름이 쓰이고 있을 정도다. 멀리 소련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교포들의 아리랑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가요들을 토대로 하여 주로 강원도 일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정선아리랑’, 호남지역의 ‘진도아리랑’ 그리고 경상남도 일원의 ‘밀양아리랑’을 묶어서 3대 아리랑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이들 세 가지 아리랑이 각 지역 민요의 기본적 음악 언어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 내의 자생적인 전통민요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경우, 이른바 ‘경기아리랑’ 또는 ‘서울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특정인의 창의적인 윤색을 거쳐 인위적으로 변이되었다는 뜻에서 ‘신민요아리랑’으로 분류함으로써 3대 ‘전통아리랑’과 구별된다.

정선과 진도 그리고 밀양 등 3대 아리랑을 전통민요 아리랑으로 볼 때 그중에서도 ‘정선아리랑’은 메나리조(산유화(山有花)를 풀어서 ‘뫼놀이’라 한 것이 메나리로 되었다는 설과 옛 민요 ‘미나리꽃은 한철이라’하는 데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매우 구슬프고 처량한 느낌을 주는 민요조)의 밀착성이 짙어 주어진 지역 민요의 음악적 문법의 기층성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정선아리랑’이 민요적 지역성과 전통성을 으뜸으로 간직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달리 말하면 ‘정선아리랑’은 짙은 민요적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오늘날 정선의 현지 주민들에게서 그 기원이 고려 말에까지 소급될 것으로 믿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아리랑의 정통을 이은 계승자로서의 긍지를 실감할 수가 있다. 그들은 아리랑의 발상지가 그들의 생활공간인 태백산맥의 중허리일 것으로 믿고 있다.

아리랑이 사회화하고 역사화하는 제2의 충격은 일제의 침략 때문에 촉발된 것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표현이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이었다고 더불어 가정해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아리랑의 사회화와 역사화는 8·15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중첩되어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아리랑의 자체 변화는 민간전승이 역사적 변화에 적응한 결과라고만 설명될 이상의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민간전승이 민간전승으로서 다른 차원으로 옮겨 갔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민간전승이 민간전승의 테두리를 떠나 다른 문화영역으로 옮겨 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농어촌 전통사회의 민간전승에서 좁게는 도시 민간전승, 넓게는 사회 민간전승으로 탈바꿈해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다른 민간전승에서 그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든 것이다. 이 경우, 사회 민간전승이란 동시대의 한국 사회 전체가 공유한 민간전승임을 뜻한다. 

한편, 아리랑은 그 사회화와 역사화를 통하여 대중문화·상업 소비문화, 그리고 창조적인 예술문화에까지 그 영역을 확대해 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