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3대 문장가 ‘김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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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3대 문장가 ‘김수온’
  • 김동진기자
  • 승인 2021.08.1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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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우 김수온 선생 영정
식우 김수온 선생 영정

조선시대 3대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학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식우 김수온(金守溫, 1409~1481) 선생이다. 그 명성은 조선을 넘어 명나라에까지 알려져 유명했다. 책을 한 장씩 뜯어서 들고 다니며 외우다가 다 외우면 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신숙주의 ‘고문선(古文選)’을 빌려서는 한 장씩 뜯어 벽에 발랐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조선 성종은 어명으로 번역과 간행에 많은 업적을 남긴 조선 초기의 학자인 김수온 선생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사당을 세우게 했다. 이 사당이 ‘김수온 부조묘’이다. 1984년 12월 3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되어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지산동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종곡리에 있었던 것을 조선 현종 5년(1664) 우암 송시열에 의해 이곳으로 옮겼다. 

조선 태종에서 성종 때의 학자

김수온은 조선 태종에서 성종 때의 문신, 학자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다. 자는 문량, 호는 괴애, 괴옹, 식우, 본관은 영동이다. 부친은 소윤을 지내고 영의정으로 증직된 김훈이다. 

1441년 32세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가 되었으며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학사가 되었다. 1446년 37세에 부사직이 되고 이어서 훈련원주부, 승문원교리, 병조정랑을 거쳐 1451년에 전농시소윤, 이듬해 지영주군사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1457년에 사예로서 문과 중시에 2등으로 급제해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1458년에 동지중추부사에 올라 정조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9년에 한성부윤, 1460년에 상주목사, 1464년에 지중추부사,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1466년에 발영시와 등준시에 모두 장원, 판중추부사에 올랐다. 이때 쌀 20석이 하사되었는데 문무과 장원에게 쌀을 하사하는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호조판서를 거쳐 1468년에 보국숭록대부에 오르고 1471년에 좌리공신 4등에 책록되며 영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474년에 영중추부사를 역임했다.

세종 때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존경하던 고승 신미의 동생으로 불경에 통달하고 제자백가와 육경에 해박해 뒤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널리 경사에 통달하고 문장이 웅건하여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특히 시문에 뛰어나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한림 진감과 ‘희정부’로써 화답한 내용은 명나라에까지 알려졌다.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 불경의 번역과 간행에 공헌했으며 세조의 명으로 원각사 비명을 지었다. 성삼문, 신숙주, 서거정, 강희맹, 이석형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며 문명을 다투었다.

치평요람, 의방유취 등 각종 편찬 작업, 사서오경의 구결에 참여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명황계감, 금강경 등을 한글로 풀이했다. 저서로는 식우집이 있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1469년에 강원도 양양에 건립된 낙산사 종의 명문과 1471년에 건립된 원각사비 비문을 지었다.

1984년 12월 3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된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지산동에 있는 김수온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김수온 부조묘’
1984년 12월 3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된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지산동에 있는 김수온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김수온 부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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