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풍토록’을 지은 김정(金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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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풍토록’을 지은 김정(金淨)
  • 김동진기자
  • 승인 2021.10.2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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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의 ‘충암집(冲菴集)’과 그림 ‘조도(鳥圖, 새)’. ‘조도’는 300년쯤 뒤에 연암 박지원도 훤히 꿰뚫고 있었던 그림이다.
김정의 ‘충암집(冲菴集)’과 그림 ‘조도(鳥圖, 새)’. ‘조도’는 300년쯤 뒤에 연암 박지원도 훤히 꿰뚫고 있었던 그림이다.

충북 보은이 고향으로 상현서원에 제향된 그. 정치적으로 조광조의 개혁정치 세력 가운데 핵심 인물이었던 그. 여기에 문신이자 학자였던 그. 바로 김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기묘사화로 제주로 유배되어 1년 정도의 유배생활 동안 제주도의 여러 곳을 답사하며 ‘제주풍토록’을 비롯해 ‘우도가’와 한라산 ‘기우제문’을 짓기도 했다. 

김정(金淨, 1486년~1521년)의 자는 원충, 호는 충암·고봉이며 경주 김씨 충암공파의 시조이다. 충청도 보은현에서 태어나 조선전기 이조정랑, 순창군수,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3세에 할머니 황 씨에게 수학하며 20세 이후에는 최수성, 구수복 등과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했다. 한학과 시문에도 능했으며 새와 짐승 등 그림에도 솜씨가 있었다. 

1507년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 수찬, 병조좌랑, 정언, 병조정랑, 부교리, 헌납, 교리, 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됐다. 이때 왕의 구언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의 복위 주장과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 등의 추죄를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됐다. 이때 권민수와 이행 등은 이들을 엄중히 다스릴 것을 주장한 반면 영의정 유순 등은 이에 반대했고 조광조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간 사이에도 대립이 생겼고 둘 다 옳다는 설까지 제기됐다. 1516년 석방돼 박상과 함께 다시 홍문관에 들고 권민수와 이행의 파직으로 마무리됐다. 그 뒤 사예, 부제학, 동부승지, 좌승지, 이조참판,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됐다. 그의 정치적 성장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녔다. 

일찍이 사림 세력을 중앙 정계에 추천했고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우며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였다. 그들의 세력 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 설치의 적극 주장,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 정치의 일환으로 미신 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 등을 추진했다. 

그 뒤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됐으나 영의정 정광필 등의 옹호로 금산에 유배됐다가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옮겨갔다. 이후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사사됐다. 1545년(인종 1) 복관,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됐다. 시호는 문정으로 나중에 문간으로 고쳐졌다.

그의 제자로는 김봉상, 김고, 최여주 외에 조카인 김천부, 김천우 등이 있다. 보은의 상현서원, 청주의 신항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금산의 성곡서원 등에 제향됐다. 

그가 남긴 ‘충암집’에 ‘제주풍토록’이 실려있다. 머물렀던 적소에 그의 심정을 노래한 ‘임절사(臨絶辭)’라는 시 한 편이 남아 있다.

“절지(絶地)에 와 외로운 넋이 되는구나. 멀리 어머니를 두고 가니 천륜도 어겼나니. 이 세상 두고 이 목숨 끊어지나. 저 세상에 가서 역대 상감의 문지기가 되리로다. 또한 굴원을 따라 높게 소요하련만 기나긴 어둔 밤 언제나 아침이 되랴. 일편단심의 충성 쑥밭에 파묻혔고 당당한 장부의 뜻 중도에 꺾였으니 오호라 천추만세가 내 슬픔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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