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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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초상화
  • 김동진기자
  • 승인 2021.11.1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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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원나라 화가인 진감여가 그린 이제현의 초상화로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10호로 지정됐다.
고려 후기 원나라 화가인 진감여가 그린 이제현의 초상화로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10호로 지정됐다.

고려 말 원나라의 화가인 진감여가 그린 이제현 초상화. 국보 제110호로 1962년 12월 20일에 지정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본관은 경주, 초명은 이지공(李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이다. 고려 건국 초 삼한공신 이금서의 후예, 아버지는 검교시중 이진. 아버지가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비로소 가문의 이름이 높아졌으며 그의 딸은 공민왕과 혼인해 1359년(공민 8) 4월 혜비에 봉해졌다.

이 초상화는 비단 바탕에 채색한 그림으로 세로 177.3㎝, 가로 93㎝, 고려시대 진본 영정으로 전신상의 화폭이 거의 완존해 초상화 사상 큰 비중을 차지한다. 

화폭 상단에 적힌 제문을 통하여 그 제작 시기와 필자를 알 수 있다. 이제현이 33세 때인 1319년(충숙왕 6)에 충선왕을 시종하여 중국의 강호를 유람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충선왕은 진감여를 불러 이제현을 그리게 했으며 당시의 원나라 석학인 탕병룡이 찬문을 지었음도 알 수 있다.

그는 귀국할 때 이 영정을 가지고 오지 못했는데 그로부터 33년 후 다시 원나라에 건너갔을 때 우연히 그 영정을 다시 보게 돼 그 감회를 40자의 시로 읊었다.

이 영정 위에 적힌 자찬시는 ‘익재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일치하지만 화가 이름을 오수산 필이라 하여 문집과 초상화가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초상화 위에 쓰인 자찬에서 화사를 진감여라고 언급했으므로 이 초상이 진감여 필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 초상은 오른쪽 얼굴이 보이는 우안팔분면(右顔八分面)으로 심의(深衣 높은 선비의 웃옷)를 입고 공수자세(拱手姿勢)로 앉은 전신상이다. 인물을 중심으로 상부 공간에는 제문과 찬문을 여유있게 적어 놓았다.

오른편에는 몇 권의 서책이 놓인 탁상을 안배하여 밀도 있는 화면 구성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의자의 손잡이는 앞으로 서탁(書卓)은 인물의 뒤로 자연스럽게 배치됨에 따라 인물의 취세(取勢)의 안정성이 확보되어 있다.

안면은 선염 효과없이 묘선으로 규정돼 있지만 그 선이 단순한 철선계(鐵線系)로 빽빽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성격을 달리하여 부드럽게 처리되어 있다. 채색 역시 가라앉은 색조를 보여준다. 이 점은 이 화본이 오래되었다는 자연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 초상화는 현재 전해 오는 몇 폭의 고려시대 초상화가 대부분 이모본(移模本)이어서 전신(傳神)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실정에서 주목되는 진적(眞蹟)이다. 또한 사신(寫神)이 정묘하여 원나라 제일의 명수라 칭하여지던 진감여의 초상화 묘법이 충분히 인정된다.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거의 좌안을 고집하고 배경이 거의 없이 나타나는데 비해 다채로운 화면 구성과 함께 우안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초상화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회화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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