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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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32)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12.02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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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까지만 해도 직장에 다니다 결혼하면 여자는 사표를 내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KAL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 역시 결혼하겠다고 결정한 순간 결혼과 동시에 당연히 대한항공을 그만둔다는 생각을 했었다. 결혼이 급하게 진행되는 바람에 나는 부랴부랴 인사과장을 찾아가 결혼하게 되어 사표를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인사과장은 갑작스러운 내 사직 소식에 놀라면서 알았다며 위에 보고하고 처리를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 후 조중건 부사장님이 나를 불렀다. 조 부사장님은 내 결혼 소식을 보고받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대한항공은 알다시피 여직원은 결혼과 동시에 사표를 내고 미혼여성만 근무해왔는데 우리가 상의한 결과 송지호 씨는 결혼하더라도 대한항공 처음으로 기혼여성을 써보려고 하니 본인이 원하면 우리 회사에 계속 남아 근무해 주기를 바라는데 생각은 어때요.”

배려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사장님께서 직접 이렇게 저를 불러 큰 결단을 해주시니 저로서는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없습니다. 회사의 새로운 결정의 취지를 살려 결혼 후에도 전과 다름없이 최선을 다해 근무하겠습니다.”

특별한 배려로 나는 결혼 후에도 KAL에 남게 되었다. 그 소식은 조선호텔 국제선 사무소 위층 직원들에까지 퍼졌다. 여직원들에게 기혼 여성도 근무할 수 있다는 소식은 무엇보다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기쁜 소식이었다. 그들은 내게 결혼 후에도 여전히 인정받아서 기혼여성도 기혼남성처럼 문제없이 근무를 잘한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면 덕분에 자기들도 결혼 후 근무할 기회가 생겼다며 좋아했다.

나는 그간 대한항공에 입사해서 좋은 일도 있었고 힘든 일도 겪었지만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은 태도로 임했다. 나는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곳에서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다. 

무슨 일을 하든 최고가 되어야 직성이 풀렸다.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가 있는 곳에서 그 일을 해결하는 것에 더 보람 있었다. 나는 속으로 그런 나를 염두에 두고 회사에서는 크게 인정을 해주어 그동안 나를 회사에 붙잡아 두려고 과분한 대우를 해주었는지 모른다.

대한민국의 뼛속까지 배어있는 학벌 사회에서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메디컬센터 간호학교 출신이 서울대, 고대, 이대 출신들에 앞서 수석 합격한 것에 주목했을 것이다. 또 입사 후의 나의 근무 고과 성적과 위기관리능력 그리고 영어 능력 등 나의 근무태도를 인정해준 것이리라. 이로써 대한항공 여직원들의 소원을 풀어주었고 이에 나는 감사함과 보람을 느꼈다. 그런 엄청난 변화 속에서 나는 결혼했다.

배려받은 이상으로 더욱 성의를 다해 근무했다. 그즈음 NMC 동문 영나이팅게일 행사의 사회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최규옥 동문회장으로 부터 받았다. 행사장에서 오랜만에 안병훈 국립의료원장님을 뵙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안 원장님께서는 나를 보자마자 말씀하셨다.

“아니, 송 선생은 왜 남의 회사에 가서 일하고 있는 거요? 당장 학교로 와서 후배들이나 가르쳐요.”

옆에 있던 교무과장을 보며 빨리 나를 불러 학교에 근무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대한항공에서의 큰 은혜를 입은 내가 쉽게 퇴사를 결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안 원장님의 단호한 말씀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서 남편과 상의했다. 남편은 내가 결혼을 했으니 직장을 계속 다니고자 한다면 대학이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대한항공은 결혼 전에는 좋은 직장이지만 가정을 가지면 학교가 나을 것 같으니 KAL을 그만두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학교로 가는 것이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겠다 싶어 그렇게 하기로 했다.

하지만 대한항공에 사직하겠다는 말이 쉽게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특별한 배려를 받은 지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사직하려니 도저히 염치가 없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의 또 다른 미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여직원들이 많이 아쉬워했지만 나는 그들에게 내가 일단 처음으로 기혼여성으로 근무하는 첫 문을 열었으니 모두에게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길지 않은 2년 간의 화려한 외출이었다. 대한항공은 내게 다양한 생의 가치와 개인에게 최선을 다해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또 누구보다 나를 인정해 준 잊을 수 없는 직장이었다.

다시 돌아온 NMC
임시 전임강사 발령

1973년 8월, 나는 대한항공의 두꺼운 유리천장을 깨고 기혼여성 근무라는 첫 문을 열었으나 무슨 인연인지 박차고 나왔던 NMC에 다시 발을 딛게 되었다. 학장을 겸직하고 계셨던 안 원장님은 나를 임시 전임강사로 발령냈고 나는 일부 과목 강의와 실습 지도를 하게 되었다. 

사표 내고 나간지 만 2년 만에 돌아왔지만 학교도 병원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임상에 나가도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다시 한번 우리 학교 교육과정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우리가 3학년 졸업반이 되었을 때 간호과 각 병동 수간호사들에게 타교 출신 졸업 간호사와 우리 학생을 선택하라면 거의가 학생인 우리를 배치해 달라고 할 정도였다. 그것이 우리 학교의 우수성이었다. 

내가 대한항공에 근무할 당시 한양대학교 초대 의과대학장 겸 의료 원장으로 가신 윤유선 원장님께서 학교에 한 번 들르라고 하셨다. 그때 윤 원장님은 나에게 한양대 의대에 간호학과가 개설될 테니 한양대 간호학과 전임강사로 와서 한양대를 키우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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