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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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77)
  • 송지호 작가
  • 승인 2022.12.01 1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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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루는 큰아이가 집에 오더니 “엄마 내가 돈을 4천 원을 주워서 파출소 경찰 아저씨한테 갖다 주면서 주인을 찾아 주라고 줬더니 아저씨가 알았다며 그 돈을 받아서 아저씨 바지 주머니에 넣었어요. 혹시 경찰 아저씨가 주인을 찾아주지 않고 자기가 가지는 건 아닐까요?” 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아들이 혹시라도 평소 우상처럼 여기는 경찰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일이 될까 봐 걱정되어 “아니야, 그건 네가 보기에 아저씨가 주머니에 넣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을 거야. 아저씨가 그 돈을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주인을 찾아 주었으면 네가 보기에 더 믿음이 갔을 수도 있지만, 주머니에 넣었어도 경찰 아저씨는 틀림없이 그 돈을 주인에게 꼭 돌려주려고 노력하실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안심시켰다.

둘째 아들도 마찬 가지였다. 비 오는 날에 아파트 앞에서 놀다가 비에 젖어있는 돈을 주워서 기어이 학교 앞 파출소에 가져가서 주인을 찾아주라고 맡기고 왔다. 6학년 때 하루는 저녁 먹고 난 후 아빠와 집 앞에 있는 반포고등학교 운동장을 산책하고 있었다. 이미 깜깜해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둘째 아들은 불빛에 보였는지 지갑 하나를 주웠다. 지갑 안에는 2만 원과 학생증이 들어있었다. 학생증을 들여다 본 아들은 학생증에 있는 주소를 보고 곧바로 주소지 아파트를 찾아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어머니 되는 사람이 나왔고, 아들의 주운 지갑을 돌려주러 왔다고 말했다. 그 어머니는 그러잖아도 돈보다도 학생증을 잃어 버려서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며 세상에 이렇게 착한 학생을 처음 보겠다며 반색하고 한사코 마다하는 아들을 집안으로 끌고 들어가서 양쪽 주머니에 귤을 잔뜩 넣어 주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남편 말대로 돈을 보아도 줍지 말라고 가르쳤었다. 그런데 큰아들이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엄마 말대로 내가 돈을 발견하고도 그대로 운동장에 두었더니 다른 애들이 돈을 얼른 주워 가지고 가서 뭘 사 먹는데 써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주인은 절대 찾을 수가 없을 테니까 차라리 내가 주워서 파출소 경찰 아저씨한테 가져다주고 주인을 찾아 주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애들이 주우면 다 지들이 써 버리니까요. ”큰아이의 말이 맞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주운 돈은 행운이라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가져가 사용해 버렸지만, 아직 어린아이에게 교육상 으로 보면 큰아들의 말이 더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그렇게 하도록 했었다.

아빠를 꼭 빼닮은 두 아들과 그 원조인 아빠. 나는 우리 집 세 남자의 닮은꼴 모양을 지켜보며 응원하는 유일한 응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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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출혈로 사경을 헤매다

큰아들을 임신하고 출산예정일이 우리 대학 입학시험과 겹치면서 퇴근하지 못하고 교수들과 함께 학교에서 잤다. 75년 당시만 해도 대학 입학시험이 대학별 본고사였기 때문에 입시는 각 대학의 가장 큰 행사였다. 또 학교는 시험 전날 국정교과서에서 입학 시험문제를 인수해와 하룻밤을 학교에서 보관해야 했기에 엄청난 부담이 있었다. 입학 시험문제를 인수하러 갈 때도 교수와 직원이 함께 갔고 경찰까지 동승시켜 보안을 유지했으며 시험문제를 학교 캐비닛에 넣고 봉인한 채 경찰과 교무과장이 관리했다. 그래서 입시 전날 밤에는 큰 방에서 모든 교수가 침대를 놓고 학교에서 잠을 자야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자정을 넘기고 슬슬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참아보았지만 진통이 심해져 새벽 5시쯤에는 더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상황을 설명하고 모성간호학 담당 교수인 변수자 교수님과 동행해서 산과에 입원할 수 있었다.

의사가 진찰 후 초산이라서 내일은 되어야 분만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입원하기 전 Friend 씨가 보내준 책에서, 분만 전에 우유와 아연, 마그네슘 등을 먹고 분만에 들어가면 분만시간이 빨라진다고 하여 Friend 씨가 보내준 비타민과 미네랄제제 등을 내용대로 먹고 들어간 상태였다. 의사는 거듭 초산이라 그날은 넘기고 출산하게 될테니 느긋하게 마음을 가지라고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날 오후 4시 반에 큰아들을 낳았다. 의사는 도대체 분만이 그렇게 빨리 진행된 이유를 알 수가 없다며 특별한 케이스라고 하였다. 다만 나는 말은 하지 않은 채 책에 있는 대로 먹은 것이 효과를 본 것으로 확신했다. 입원해서 남편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분만을 하고 입원실로 옮긴 후에야 남편과 시어머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둘째 아들 출산은 큰아들 출산할 때 담당했던 NMC 의사가 백병원 과장으로 가는 바람에 나는 그 의사를 따라 백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둘째 아들 출산일이 하필이면 80년 5월 18일 3일 전이었다. 그날 점심시간에 남편과 시어머님이 면회를 오셨다. 분만일이 자꾸 지연되어 그날도 의사가 분만 촉진제를 아침에 주었으나 별 효과가 없다며 다음날에나 촉진제를 다시 써보자고 했다. 나는 직장에서 잠깐 짬을 내어 면회 온 남편과 시어머님이 나 때문에 힘드실 것 같아 죄송한 마음에 분만이 아직 멀었으니 가시라고 재촉하여 가시도록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편과 어머님이 가시자마자 진통이 시작되더니 30분 만에 나는 분만실로 옮겨졌다. 분만실에 들어가 분만 테이블에 누운 후 의사가 힘을 주라는 말은 들렸지만, 분만대를 꽉 잡았던 손이 계속 맥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아무리 다시 기운을 내려 해도 손에 힘이 풀려 도저히 어려워지자 의사는 감자 분만을 시도하여 진공으로 아기 머리를 잡아 꺼냈다. “아들이에요” 하는 소리를 듣고 잠시 후 병실로 옮겼다. 의사의 “힘들었으니 푹 쉬라”는 말이 어렴풋이 들렸다.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된 것은 인턴이 분만을 담당한 과장님에게 소리쳐 전화하는 소리를 듣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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