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옥천군수 용장 권희인(權希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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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옥천군수 용장 권희인(權希仁)
  •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23.03.23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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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진해 웅천전투서 순절한 충신 권희인 옥천군수 사당 충효사 모습. 경북 안동에 있다.
임진왜란 때 진해 웅천전투서 순절한 충신 권희인 옥천군수 사당 충효사 모습. 경북 안동에 있다.

문무 겸비 옥천군수 웅천전투 순국 

권희인(權希仁) 군수는 서포 만호로 임진왜란 초기에 영남의병장 김면(金沔) 의병장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그의 천거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옥천군수 겸 충청도조방장을 제수 받았던 문무를 겸비한 군수였다.

이듬해인 1593년 지금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전투에서 왜군에 대항하여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충신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선조 28년) 2월 6일 기록에 의하면 “한명윤이 소매 속에서 자그마한 책을 꺼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군부(軍簿)인데, 군량을 얻어가지고 이 고을 경계에 있는 산 속에 숨어서 적을 무찌를 계획을 하기 원한다’ 하기에, 신이 군량을 넉넉히 주고 또 용장(勇將) 권희인(權希仁)으로 하여금 협력하게 하였더니 그 뒤에 누차 밤을 이용해 공격하여 적이 물러갔습니다. 권희인은 웅천(熊川)의 싸움에서 죽고 한명윤은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있다가 중국군에게 구타당해 죽었습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문무를 겸비했던 충신 권희인 옥천군수는 『옥천군선생안』, 『기옥천사』 등을 저술했다.

안동풍산 무인 가문 출생 천하장사

권희인 군수의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사안, 호는 삼암(參巖)이다. 삼암공 권 군수는 1558년(명종 13년)에 아버지 어모장군 권언균과 장사랑 김택신의 딸인 광산 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안동 풍산에서 태어났다. 삼암공은 어릴 때부터 용모가 범상치 않았고 매우 용맹하였다고 전해진다. 일찍이 5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하늘 밖에도 역시 만물이 있다”고 말하여 주변 사람들은 그 뜻의 원대함과 영특함에 매우 놀라곤 했다.

젊은 시절 권 군수는 글을 읽는 틈틈이 몸을 단련하고 수양키 위하여 저녁에 큰 돌 두 개를 집 뒤에 옮겨 놓았다가 새벽에 제자리에 갖다 놓는 등 신체 단련을 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삼암공 권 군수의 용력을 시험하기 위해 “집 대들보에 박힌 못을 뽑을 수 있느냐“고 묻자 삼암공은 세치나 되는 못을 뽑아 다른 대들보에 박으니 대들보가 빠개져 버렸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은 삼암공의 무인다운 기상과 천하장사의 힘에 대경실색 모두들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12살 되던 해인 1569년(선조 2년)에 어머님을 여위는 모친상을 당했음에도 슬픔을 이겨내며 어른과 같이 그 아픔을 가슴에 담고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경서를 공부하고 시문과 글을 지으며 면학에 열중했다. 16세에 장가를 들고 19세에 서애 유성룡(柳成龍)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한다. 이때 유성룡 선생은 그의 기상이 영웅호걸과 같은 기개와 활과 화살을 갖추고 궁술과 무술이 뛰어나고 학문의 재주 또한 다른 제자들보다 뛰어나서 문무를 겸하여 면학할 것을 권유했다.

탁월한 경세가이며 정치가인 스승 유성룡 선생은 나라에 큰 동량이 될 것을 미리 점 찍어 삼암공에게 무과를 권유하면서 무과 급제는 바로 나라의 금상 즉 임금을 섬기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약관 22세 무과 장원 급제
탁월한 무예, 유성룡 선생 제자

 
충신 권희인(權希仁) 옥천군수는 22세인 1579년(선조 12년)에 스승 유성룡 선생의 명한 바대로 무과 대과에 응시하여 1등으로 급제했다. 3년 전에 충무공 이순신께서 무과에 급제하였을 당시 나이가 32세였던 점으로 보아 22세에 무과에 장원, 급제했다는 것은 삼암공의 탁월한 무술과 기예가 아주 뛰어 났음을 알 수 있다. 권희인 군수는 무과 급제 후에 스승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에게 서찰을 한 장 보냈다.

무과에 급제하여 안동(安東) 고향에 기쁨에 넘쳐 금의환향하지만 삼암공은 내심 선비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승 유성룡(柳成龍) 선생의 무과 급제가 임금을 섬기는데 단초가 될 것이라는 그에 대한 평소의 믿음을 굳게 믿었다. 조선 초기부터 유교의 성리학적 문치주의(文治主義)를 200년간 추구함으로써 임진왜란 전 조선 사대부인 양반층은 무과에 대해 무시하는 경향이 팽배하였고 문약에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무인과 장수, 병법 등 무(武)에 대해 중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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