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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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110)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3.04.1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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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의주 행재소로 북상을 준비하다

조헌이 기병한 목적은 근왕에 있었다. 기병 후 물자와 무기 등을 확보하기 위해 충청우도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에 청주성이 왜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출전한 것이다.

중봉의병은 청주성을 회복한 뒤에도 여전히 물자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는 기병후소(起兵後疏)에서 청주성에서 도망하는 적을 쫒지 않은 이유를 “적을 쫒아 가면 힘들이지 않고 이를 잡을 수 있을 줄 믿으나 화살을 너무 많이 써 버린다면 근왕(勤王)의 행진에 참된 성실을 다하지 못할 염려가 있으므로 그만두었습니다.” 라고 병기와 물자부족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더구나 청주성에 왜적이 도망할 때에 놓고 간 많은 곡식을 방어사 이옥(李沃)이 모두 불태웠으니 당장 의병들을 먹일 식량도 문제였다. 이제 추석도 지나서 날씨가 쌀쌀해지는데, 의병들의 겨울 준비도 해야 했다. 조헌은 마침내 군사의 일부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고 겨울옷을 준비해서 다시모여 임금께 충성을 다하자고 결의했다. 이때, 의병 중에서 독자인 사람과 부모를 봉양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는 의병은 집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하였다.

이렇게 해서 다시 모인 의병이 1천 명이 넘었다. 조헌은 최초 계획대로 이 병력을 이끌고 임금이 피난한 의주(義州) 행재소로 근왕을 나서기로 하였다. 청주에서 의주는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지역이 왜적에 의해 점령되었다. 중봉은 이에 대한 준비로 진출로 상에 있는 30개 고을에 보낼 지로문(指路文)을 작성했다. 이 고을 연결하면 조헌이 계획한 북상 통로를 알 수 있다. 

그는 충청도에서 경기도와 황해도를 거쳐 평안도 의주에 이르는 서해의 북상로를 택했다. 그는 수원–남양–안산–인천–부평–김포–통진–강화–교동–연안–배천–평산-해주–신천–안악-은율・장연–삼화・강서・함종・영유–숙천–안주–박천・가산–정주–곽산・선천–철산–의주 등지의 고을에 근왕시지로문(勤王時指路文)을 보낸다. 지로문의 내용은 각 고을에서는 적정을 살피고 향병을 모집하여 우리 군대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서로 합력하여 적을 공격하고 통로를 확보하자. 그리고 각 고을이 군량을 협력하여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을 추위가 오기 전에 모아야 하는 일도 일렀다. 조헌이 의병을 이끌고 아산까지 진출한 것을 고려하면, 지로문이 어디까지 전해졌는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다음은 근왕시지로문(勤王時指路文)의 머리말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근왕시지로문(勤王時指路文)

“충청도 의병장 전 제독관(提督官) 조헌(趙憲)은 결사대 3천 명을 소집하여 8월 초1일 사시(巳時)에 승장(僧將) 영규(靈圭)가 인솔하는 승군과 더불어 합세하여 청주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을 포위했다. 한편 방어사 이옥(李沃)등이 인솔하는 연기(燕岐), 문의(文義), 청주(淸州) 등의 곳에서 군병의 지원을 재촉하면서 온종일 힘껏 싸웠다. 왜적의 살상자는 심히 많았다. 적의 세력은 궁(窮)하고 어려워 죽치고 들어 있었다. 적병은 시체를 불태워 버리고 어두운 밤을 이용해서 도망쳤다. 나는 군사를 이끌고 연기로 향했다.

바야흐로 아산(牙山)과 직산(稷山) 사이로부터 날짜를 정하여 북쪽으로 정벌함으로써 왜적을 모조리 섬멸하여 단 한 놈도 제 나라에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경기와 황해도의 여러 읍(邑)의 관리와 백성들은 적의 세력을 세밀히 살피고, 향병을 많이 모집해서 공격할만한 것은 이를 공격하여 도로(道路)를 통하고 공격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전략을 세웠다가 우리의 군대가 오는 것을 기다려서 힘을 합하여 공격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달 안으로 임금께서 옛 서울로 환궁(還宮)하시게 하려는 의도를 기약하며 별도로 이웃 군(郡)에 알아듣도록 타일렀다. 그리고 각 군(各郡)은 군량(軍糧)을 서로 도와서 추위가 오기 전에 일을 잃고 사방으로 도망가 흩어진 우리의 백성을 다시 안집 안전하게 모이게 할 일도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로문은 이러한 머리말에 이어서 각 고을마다 미리 준비할 일과 근왕군을 이끌고 지날 때에 해야 할 등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특히, 추위가 닥쳐오는 이때에 고통 받는 백성들에 대한 걱정과 대책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 눈에 뜨인다.
 

조헌이 기병한 목적은 근왕에 있었다. 기병 후 물자와 무기 등을 확보하기 위해 충청우도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에 청주성이 왜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출전한 것이다.

중봉의병은 청주성을 회복한 뒤에도 여전히 물자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는 기병후소(起兵後疏)에서 청주성에서 도망하는 적을 쫒지 않은 이유를 “적을 쫒아 가면 힘들이지 않고 이를 잡을 수 있을 줄 믿으나 화살을 너무 많이 써 버린다면 근왕(勤王)의 행진에 참된 성실을 다하지 못할 염려가 있으므로 그만두었습니다.” 라고 병기와 물자부족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더구나 청주성에 왜적이 도망할 때에 놓고 간 많은 곡식을 방어사 이옥(李沃)이 모두 불태웠으니 당장 의병들을 먹일 식량도 문제였다. 이제 추석도 지나서 날씨가 쌀쌀해지는데, 의병들의 겨울 준비도 해야 했다. 조헌은 마침내 군사의 일부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고 겨울옷을 준비해서 다시모여 임금께 충성을 다하자고 결의했다. 이때, 의병 중에서 독자인 사람과 부모를 봉양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는 의병은 집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하였다.

이렇게 해서 다시 모인 의병이 1천 명이 넘었다. 조헌은 최초 계획대로 이 병력을 이끌고 임금이 피난한 의주(義州) 행재소로 근왕을 나서기로 하였다. 청주에서 의주는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지역이 왜적에 의해 점령되었다. 중봉은 이에 대한 준비로 진출로 상에 있는 30개 고을에 보낼 지로문(指路文)을 작성했다. 이 고을 연결하면 조헌이 계획한 북상 통로를 알 수 있다. 

그는 충청도에서 경기도와 황해도를 거쳐 평안도 의주에 이르는 서해의 북상로를 택했다. 그는 수원–남양–안산–인천–부평–김포–통진–강화–교동–연안–배천–평산-해주–신천–안악-은율・장연–삼화・강서・함종・영유–숙천–안주–박천・가산–정주–곽산・선천–철산–의주 등지의 고을에 근왕시지로문(勤王時指路文)을 보낸다. 지로문의 내용은 각 고을에서는 적정을 살피고 향병을 모집하여 우리 군대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서로 합력하여 적을 공격하고 통로를 확보하자. 그리고 각 고을이 군량을 협력하여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을 추위가 오기 전에 모아야 하는 일도 일렀다. 조헌이 의병을 이끌고 아산까지 진출한 것을 고려하면, 지로문이 어디까지 전해졌는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다음은 근왕시지로문(勤王時指路文)의 머리말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근왕시지로문(勤王時指路文)

“충청도 의병장 전 제독관(提督官) 조헌(趙憲)은 결사대 3천 명을 소집하여 8월 초1일 사시(巳時)에 승장(僧將) 영규(靈圭)가 인솔하는 승군과 더불어 합세하여 청주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을 포위했다. 한편 방어사 이옥(李沃)등이 인솔하는 연기(燕岐), 문의(文義), 청주(淸州) 등의 곳에서 군병의 지원을 재촉하면서 온종일 힘껏 싸웠다. 왜적의 살상자는 심히 많았다. 적의 세력은 궁(窮)하고 어려워 죽치고 들어 있었다. 적병은 시체를 불태워 버리고 어두운 밤을 이용해서 도망쳤다. 나는 군사를 이끌고 연기로 향했다.

바야흐로 아산(牙山)과 직산(稷山) 사이로부터 날짜를 정하여 북쪽으로 정벌함으로써 왜적을 모조리 섬멸하여 단 한 놈도 제 나라에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경기와 황해도의 여러 읍(邑)의 관리와 백성들은 적의 세력을 세밀히 살피고, 향병을 많이 모집해서 공격할만한 것은 이를 공격하여 도로(道路)를 통하고 공격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전략을 세웠다가 우리의 군대가 오는 것을 기다려서 힘을 합하여 공격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달 안으로 임금께서 옛 서울로 환궁(還宮)하시게 하려는 의도를 기약하며 별도로 이웃 군(郡)에 알아듣도록 타일렀다. 그리고 각 군(各郡)은 군량(軍糧)을 서로 도와서 추위가 오기 전에 일을 잃고 사방으로 도망가 흩어진 우리의 백성을 다시 안집 안전하게 모이게 할 일도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로문은 이러한 머리말에 이어서 각 고을마다 미리 준비할 일과 근왕군을 이끌고 지날 때에 해야 할 등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특히, 추위가 닥쳐오는 이때에 고통 받는 백성들에 대한 걱정과 대책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 눈에 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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