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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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 지옥임 수필가
  • 승인 2023.04.13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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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는 오늘도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길을 떠난다. 나는 지금 ‘이야기 속으로’라는 텔레비전 프로를 시청하는 중이다.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프로였으나 나그네에게 눈길이 닿는 순간 묘한 느낌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나그네는 수십 년 전에 사람이 살았다는 폐가에서 생활하고 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돼지우리보다 더한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밥을 해 먹고 잠을 잔다. 논 귀퉁이에 파놓은 샘에서 물을 퍼다 생활용수로 쓴다. 빨래는 빨았는지 말았는지 그냥 물에 적셔 넣고 있다. 봉두난발한 머리며 행색이 너무 꾀죄죄해 꼭 걸인처럼 보인다.

머리를 왜 이렇게 길렀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반백의 머리를 흔들며 나그네는 유머 섞인 억양으로 ‘패션’이라고 대답한다. 

왜 이런 곳에서 사느냐고 묻자, 사람들 사이에서 비위나 맞추며 돈 자랑, 마누라 자랑, 자식 자랑 등등 입만 벌리면 자랑으로 일관하는 사람들과 어우러져 사는 게 싫어서 그런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콧방귀가 나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니 나그네의 ‘자랑’이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내 주위에도 가끔은 어디에서든지 눈만 마주치면 자랑을 일삼는 이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듣기가 불편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돈이야 없으니 누군가에게 자랑할 일은 없겠지만, 나도 자식이나 남편 자랑으로 손가락질받을 만한 행동을 한 적은 없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보이는 것만으로 상대를 평가한 나의 경솔함에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보기에는 거지꼴에 지나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철학이 있고 자존심도 있었다. 화선지에다 써 내려가는 붓놀림이며 필체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려운 형편에도 가끔은 서점에 들러 보고 싶은 책을 사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말한다. 영어와 중국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던 취재진이 호기심이 들었는지 왜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게 되었느냐고 끈질기게 묻자, 지나온 날을 회상하는 듯 먼 하늘을 바라본다. 

깡마른 체격에 주름진 얼굴로 입을 꽉 다물고 무엇인가 한참 동안 생각하는가 싶더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말문을 연다. 조실부모하고 10년쯤 절에서 생활하다 버려진 일이며, 세계를 무대 삼아 지내다 지금까지 흘러온 세월이며, 여자에게도 버림받을까 두려워 아예 결혼은 생각하지도 못했다는 얘기까지.

버림받은 상처가 도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무조건 회피하는 것일까. 

말과 행동이 다른 인간들에게 얼마나 많은 실망을 했으면 저토록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원망할 생각은 없단다. 부모와 형제, 고향과 나이도 모르는 채 발붙일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의 인생이 너무도 가여워서 눈시울이 젖는다.

취재진과 이야기를 마치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삿짐을 싸기 시작한다. 왜 그러냐고 묻자 이곳도 자기가 머물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며 계획도 없이 즉흥적으로 생각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나그네는 전국의 폐가가 자기 집이라고 말한다. 읽어야 할 책 한 권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이삿짐이라고 해봐야 앞뒤로 도장이 꽉 들어찬 여권과 여행용 가방 하나와 배낭이 전부다.

주섬주섬 짐을 챙긴 나그네는 정처 없는 길을 떠난다. 아무도 밟지 않은 산속 조붓한 눈길에 발자국을 남기며 인적이 뜸한 폐가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올겨울은 유난히 눈도 많고 한파도 기승을 부린다는데, 어디서 어떻게 자리를 잡고 살아갈지 걱정이다. 다시는 사람에게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부디 바랄 뿐이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정처 없이 떠나며 웅얼거리는 외로운 나그네의 한 서린 노랫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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