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성터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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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터를 찾아서
  • 김대현 수필가
  • 승인 2023.04.2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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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저물어 가는 12월 마지막 일요일, 동문수학한 김 교수와 함께 내 고향 청성 성터로 답사 겸 겨울산행을 떠났다. 청성초등학교에 도착하여 운동장의 플라타너스를 보니 40여 년 전 뛰놀고 공부하던 어린시절의 추억들이 나무 사이로 어린다. 주차하고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소나무 숲을 지나 한참 올라가니 쌓인 낙엽 위에 이름 모를 야생동물 똥이 보이는가 했더니 갑자기 산토끼가 떡갈나무 숲 사이에서 뛰어나왔다. 깜짝 놀라 보니 또 오소리가 어슬렁어슬렁 도망갔다. 문득, 그 옛날 초등학교 다닐 때 첫눈이 오면 전교생이 이 산에 올라가 토끼몰이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소복이 쌓인 솔잎을 밟으며 가파른 산등성이를 나무잡고 정상에 오르니 자연석 절벽 서쪽 기슭에 약 1,500미터가량의 옛 성터의 이끼 낀 돌들이 잡목 사이에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채 쓸쓸히 겨울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이 지점 산성은 청성면 산계리마을 뒷산 정상에 석축 산성지로 북동쪽을 경계 방어하기 위해 축성되었으며 수구는 남서 1,500미터로 비교적 큰 성이었으나 천년이 넘은 세월 탓으로 붕괴하고 완전히 남아있는 곳은 없었다. 높이 2~3미터로 산 정상 최고봉의 망대는 천연적인 절벽 위에 석축 하여 요새화하였으리라. 삼국사기를 보면 이 성은 신라 소지왕(486년)때 보은 삼년산성과 함께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 장군의 함성이 겨울바람에 은은히 들리는 듯하다.

정상에 서서 동쪽을 바라보니 청산 마을이 숭의산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꽃뱀같이 흐르는 보청천의 한 다리 위로 백화산이 희미하게 보이며 청산면의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는 조선말에 동학도들의 집결지였던 한 곡 문바위 마을이 장군봉 아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곡리는 박준병 육군 대장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통일신라 때에는 제2의 도읍지로 천도할 예정이었던 이 청산은 남한의 지리상 중심지로 문화유산과 전설이 서려 있는 풍수지리학상 명당으로 이름난 곳으로 유서 깊은 땅이다. 남쪽을 바라보니 내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구지산 아래 말밍이(장수리)와 궁촌이 강너머로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다시 북쪽을 바라보니 화성마을이 보이고 19번 국도 오구니 재(일명 50고개)에는 보은 옥천으로 오가는 차들이 어른거렸다. 답사 기념으로 이끼 낀 돌 몇 개를 가방에 넣고 내려오는데 김 교수는 옛 신라의 유물을 찾으려는 듯 성 돌을 뒤적거렸다.

산성 입구 느티동구나무 아래서 우연히 고향 종친 김병수를 만나 금릉 김 씨 서당 겸 재실 보수 문제를 이야기 하며 커피를 마시고 다시 토성으로 발길을 옮겼다. 성터 위 언덕을 따라 올라가니 아래는 대나무숲 참새들이 지저귀고 절벽 아래에는 보은 속리산에서 떠내려왔다는 전설이 있는 독성이 강 가운데 꽃처럼 떠 있었다. 성 둘레는 약 1,000미터가 되며 그 가운데에 삼밭과 무덤들이 양지 녘에 역사를 모르는 채 갈대숲만이 겨울 파란 하늘에 꽃처럼 아름답다. 이 토성은 굴산성 (신라 때에는 청산이 굴산이라 했다) 또는 기성 산성이라 불렀는데 분지같이 오목하고 평평한 평지가 1만여평이 넘어 산 주위를 흙과 돌로 높게 성을 쌓아 요새화하였다. 성벽이 많이 붕괴하여 완전한 곳은 별로 없으나 그 높이는 10여 미터 정도로 추측된다. 오래전 이 성의 밭에서는 신라기와편과 토기편이 무수히 출토되었다고 마을 노인들이 들려주었다.

학교를 떠나면서 40여 년 전, 가을 운동회 때에 불렀던 응원가의 한 구절 ‘신라의 터전, 승리의 깃발이 휘 휘날려라’ 아우성 소리가 들리고 천 년 전의 신라인들의 숨결이 애잔하게 스치다 은은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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