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효자 박인, 충신 박동룡
상태바
노효자 박인, 충신 박동룡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3.05.25 11: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리친 칼 대신 맞아, 아버지 살려

 포동 마을 서편 경부철로에서 농로 길을 따라 가다보면 마을이 입구 낮은 언덕에 맞배지붕 형식의 정려문 한 채가 우뚝하다. 이 정려문은 임진왜란 때 늙은 아버지 대신 왜군 칼에 맞아 죽은 효자 박인 효자정문과 박인 효자의 손자인 충신 박동룡 주부의 충신문이 함께 있다.

 이 정려문에는 한 지붕에 두 개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오른쪽은 박인(朴忍) 효자각으로 『노효자박인지려(老孝子朴忍之閭)』 또 왼쪽은 박동룡(朴東龍) 충신각으로 『충신증주부박동룡지려(忠臣贈主簿朴東龍之閭)』라 각각 각자가 새겨져 있다.

효자 집안에 충신 나고

 박인 효자는 이곳 이원면 지탄리 포동 마을에서 1533년(년)에 밀양 박씨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요당 박흥거(朴興居)의 후손으로 선조 때 군수급인 종4품 수군 만호를 지냈다. 그리고 이요당 박흥거는 국당 박흥생의 동생이고 난계 박연(朴堧) 선생과는 사촌간이다. 

어린 시절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일찍이 총명하여 학업에 힘썼다. ‘부모 살아생전에  효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수군 만호로 근무하다가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 포동 마을로 귀향했다. 그는 아버지가 병환으로 고생하시자, 온갖 약을 구해다 쓰며 극진하게 간호했다. 특히 엄동설한 속에서도 추위를 아랑곳 하지 않고 금강에서 얼음을 깨고 잉어 등 강고기를 잡아다 고아드려 기력을 회복케 하는 등 정성을 다해 효도하였다. 

 이렇게 부모님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던 중 1592년(선조 25년)에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경상 동로, 중로, 서로 세 갈래 경상대로를 통해 삽시간에 한양으로 북상하였다.

왜군 8월 이원 남쪽 강기슭 점령
 
아마도 이해 8월 중순 경에 김해에 상륙한 일본군이 낙동강 서편을 따라 북상하여 성주-김산(김천)을 지나 추풍령을 넘었다. 이어서 영동 황간, 심천을 거쳐 금강 상류의 충청대로의 교통 요충지인 옥천군 이원면 백지 · 지탄리와 원동리 사이 금강 상류 적등진에 도달한다. 그러나 충청도 10개 현 관군이 이원면 원동, 구룡리 등 비롯한 금강 산기슭을 철저히 방어함으로써 왜군은 금강을 도하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한편 이 때 왜군 2백 명은 옥천(現 영동)양산-금산제원, 추부-옥천군서 금천로 사목재-가풍 솔티재롤 우회하여 8월 20일 이원면 이원리 토티에서 관군을 패퇴시키고 옥천을 점령한다.

내려치자 아버지 몸 감싸 살려

 왜군이 금산으로 우회할 때 적등진 금강 남쪽 이원면 백지, 지탄리를 점령한 왜적들이 포동에 진격해 들어와서 노략질을 해되자, 박인 아버지는 나이가 92세 호호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몸으로 힘껏 대항했다. 그러자 왜군은 큰 칼로 박인의 아버지를 내리쳐 죽이려하자, 그 순간 효자 박인 선생이 아버지를 감싸 덮어 대신 칼을 맞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래서 박인 효자의 아버지는 무사히 목숨을 건지셨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보고된 후, 마침내 1687년(숙종 13년)에 효자 정려문을 내리고 3품 벼슬인 훈련원정에 증직되었고 영동 화암서원에 위패를 배향했다. 아마 임진왜란 개전초기 옥천을 비롯한 충북 남부지역 전황을 고찰해 보면 박인 효자가 아버지 대신 칼을 맞고 죽은 시기가 1592년 8월 중순 전후로 추정된다. 

할아버지 효자, 손자 충신문 정려  

 박동룡(~1636년, 인조 14년) 충신은 박인 효자의 손자로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할 뿐만 아니라 무예가 출중해서 일찍이 무과에 급제했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명나라 정벌을 하기 전인 1636년 12월 군사 12만 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청군 선봉대는 6천명의 기병을 앞세워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평양을 거쳐 개성까지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한양이 위급해지자, 인조는 청군에게 차단된 강화도 길을 포기하고 추위 속에서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박동룡 충신은 나라가 국난의 위기에 처하자 자원해서 급히 상경, 인조를 호위하며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이후 남한산성 아래 성남시 분당 탄천 부근인 험천진에서 막강한 청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다. 이후 나라에서는 충신 정려문을 내리고 주부에 증직했다. 한편 이 당시 험천진 전투에는 옥천읍 장야리 출신 이득남 의병장이 옥천의병 1천명을 이끌고 청나라 군사와 용맹하게 싸우다 화살이 다해 그곳에서 순절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