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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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117)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3.06.0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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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금산으로 향하는 중봉의병(重峯義兵)

 8월 16일, 선조 임금의 교지가 내려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조헌은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공주를 출발하여 금산으로 향한다. 의병들은 출발에 앞서 지금의 어려운 국난을 극복하는데 목숨을 걸고 왜적을 섬멸할 것을 굳게 맹세하였다. 조헌 선생은 의병을 일으킨 뒤에 의병들을 자식과 같이 아끼고 보살폈다. 군사를 일으킨 수개월 동안 군들에게 매질을 가하거나 형벌을 행사하지 않았으나 항상 엄숙하고 정연했다. 의병들은 의병장을 부모와 같이 받들고 따랐다. 7백 명 의병들의 비장한 각오가 있었기에 순찰사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조헌 선생을 따라서 목숨을 건 전투에 나선 것이다. 의(義) 자가 펄럭이는 깃발을 앞세우고 중봉의병은 금산의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당당한 모습으로 행군했다.

 조헌이 의병을 이끌고 유성에 도착했을 때, 영규가 수백 명의 승병과 더불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영규는 조헌에게 금산으로 진군하는 것을 만류한다.

 “모름지기 관군이 우리 뒤에 원조(援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연후에 적진에 들어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중봉이 이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미 전라도 순찰사 권율과의 협공도 약속한 바가 있고 또한, 결심이 확고한지라 눈물을 흘리며 영규에게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어디에 계시는가. 임금이 욕(辱)을 당하면 신하는 마땅히 죽는 것이니, 한 번의 죽음이 있음을 알뿐이다.” 
 하고 진군의 의지를 조금도 꺾지 않았다. 이에 영규는
 “조공(趙公)을 어찌 홀로 죽게 하겠습니까.”
 하고는 거느린 수백 명의 의승병과 함께 중봉의병에 진을 합하여 함께 금산으로 향하였다.

 이때 금산 전투에 참여한 의병과 승병의 정확한 규모는 얼마나 되었을까? 조헌 선생이 이끄는 의병이 700명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든 사료가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영규가 이끄는 의승병의 규모는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壬辰年) 8월 1일 자 “의병장 조헌과 의승 영규가 금산의 적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다”란 기록에 

 “ ‘조공(趙公)을 혼자 죽게 할 수는 없다.’ 하고 이에 거느린 승려 수백 명과 진(陣)을 합하여 함께 떠나면서 문첩(文牒)을 계속 보내어 관군이 이어 진군하도록 재촉하였다”라고, 승병의 규모가 3~4백 명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조헌 선생의 문집 “중봉집(重峰集)에도 ”영규가 승병 3백 인을 거느리고 선생을 따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료에 근거하여 금산전투에 참전한 병력 규모는 의병과 승병을 합하여 1,000명에서 1,100명 정도로 판단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다. 

 중봉의병이 금산지역에서 치른 세부적인 전투 상황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조헌 선생은 병법에 대한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상소문 중에 ”영호남비왜지책“에서 그의 전략과 전술적 측면의 혜안과 식견이 잘 나타나 있다. 이를 미루어 생각해보면 부대 이동 및 전투 간에 있었던 전술적인 활동의 개략적인 추정이 가능하다. 이러한 전제하에 앞으로 전개되는 금산 전투에 대한 세부적인 부분에서 일부 작가의 추정되는 견해가 포함되었음을 미리 밝혀 두는 바이다. 

 유성을 출발한 중봉의병과 영규의 의승병은 갑천(甲川)을 따라서 가수원 방향으로 행군한다. 행군 간에 적의 매복이나 기습에 대비하여 본대 앞으로 척후대를 보냈다. 척후대장 임정식(任廷式)은 척후병을 지휘하여 행군로 상의 중요지점을 정탐하여 본대의 안전을 보호하였다. 임정식은 조헌 선생의 문인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를 지낸 무인이다. 일찍이 왜적을 섬멸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조헌을 따랐으며, 보은 수리치 전투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 바가 있었다.

 가수원에서 흑석리를 지나 산적리 고개를 하나 넘으면 금산군 복수면 지량리가 나온다. 이 길이 금산으로 가는 가장 단거리가 될 것이다. 지량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도착한 조헌은 일단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기로 한다. 이 산의 정상이 331고지인데 산의 이름이 ”조중봉“이다. 중봉 조헌 선생이 의병을 이끌고 이곳에서 머물렀다 하여 붙여진 것으로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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