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6․25 73주년 6․25 한국전쟁 옥천 어떤 일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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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6․25 73주년 6․25 한국전쟁 옥천 어떤 일이(1)
  •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23.06.22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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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만에 점령한 북한군 서울 입성
4일 만에 점령한 북한군 서울 입성
6.25때 운행 미카 증기기관차
6.25때 운행 미카 증기기관차

 그렇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지 않고 어디 감히 필설로 말할 수 있으랴! 이번 일요일은 올해로 6.25 한국전쟁 73주년이다. 전쟁은 전 국토를 초토화 시키며 국민들에게 수많은 사상자와 참혹한 상처를 남긴다. 앞으로 한국전쟁과 같은 동족상잔의 전쟁은 한반도에서 다시는 없어야 할 일이다. 튼튼한 국방 안보로 전쟁의 불안 요인 제거하는 전제하에 평화통일로 가는 길이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6.25 사변 때 옥천을 살펴보기로 하자!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하며 한국전쟁이 터졌다. 북한군이 전격적으로 남침, 서울 점령이 눈앞에 닥쳤는데 “라디오에서는 국군이 용감하게 공산군을 반격하여 해주를 점령, 의주로 향한다”며 안심하고 생업에 열중하라“고 한다.

북한군 금강 방어선 돌파

 6월 28일 4일 만에 북한군은 제105 탱크여단을 앞세운 북한군 3사단과 4사단은 전격적으로 서울을 점령했다. 1주일 후 7월 4일 한강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 제4사단은 경부국도를 따라 파죽지세로 수원, 평택으로 남하한다. 오산 죽미령 고개에 도착한 미24 사단 선발대인 제21연대 스미스 부대와 북한군은 잠시 접전하여 제압하고 대전으로 향했다. 이에 한국군과 미군은 교통의 요충지인 대전 사수를 위해 금강과 소백산맥방어선을 구축하며 북한군 3, 4사단은 경부 축과 2사단은 충주-음성-청주를 축선으로 하는 각 지역에서 국군은 열악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방어전을 펼쳤다. 7월 4일 청주지역 주민 소개령이 내려지고 7월 초중순경 옥천군 보도연맹원 등 일제검속, 7월 13일 청주 함락, 7월 14 대전에서 이승만 정부와 육군본부 대구로 이동했다. 북한군 3, 4사단은 14일 연기군 대평리(현 세종시) 금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대전 외각인  유성 등지에서 미군24사단 34연대 대전 방어부대와 접전이 벌어졌고 논산과 금산으로 우회한 북한군 제3사단은 대전 동남부 판암동에서 세천·옥천으로 이어지는 경부국도 양측에 매복하였다.

 그 당시 전쟁 상황에 대해 어떤 주민은 “간혹 신작로 모퉁이에 비치는 군용차 대열이 불빛이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괜한 불안감을 더해주었다. 학교 옆길에 봇짐을 진 피난민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밤이면 수십 명씩 잠을 자고 떠나갔다”고 회상했다.

7월 20일 북한군 대전점령 

 한편 옥천 증약리 마달령 고개 산지에 진지를 구축한 미24사단 21연대 1대대가 경부국도 방어선을 구축하고 미24사단 부사령관은 대전 철수를 대비, 옥천농고에 임시사단 지휘소를 설치하였다. 대전·옥천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인 16일 피난민 소개령이 내려졌다. 한편 청주남부-보은 회북 간 피반령에서는 국군 2사단 이한림 사단장과 북한군 2사단이 접전을 했다. 18일 본격적인 대전공방전이 미군24사단과 북한군 3, 4사단및 105여단사단 사이에서 벌어졌다. 북한군은 이에 앞서 19일 새벽에는 대전 미군 24사단의 남쪽 탈출로인 옥천읍 북편 경부국도 옥천읍 서정리 철교를 끊기 위해 북한군 야크기 6대로 선제 폭격하여 퇴로를 끊으려 했다. 그  당시 사람으로 오인한 야크기의 기관총 사격로 삼거리 척화비에 탄흔이 남아 있고 이곳 서화천의 군서교 등이 파괴되어 철수해오던 미군들은 헤엄쳐서 서화천을 건너야 했다. 7월 19~20일까지 증약 마달령 산악지대에서 미군과 논산-금산을 거쳐 대전 남동부지역으로 우회한 북한군 3사단 선발대와 전투를 치렀다. 7월 20일 북한군 3, 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대전을 점령했다. 북한군 3사단 주력부대는 대전지하철 차량 본부 식장산 기슭과 세천 고개에 매복하여 북한군 4사단 주력에게 밀려서 7월 21일 미군은 대전철수 명령을 내리고 대전역의 탄약과 각종 군수물자를 비행기로 폭격, 파괴했다. 

세천-옥천으로 철수하는 미군 24사단을 세천고개와 지하철차량본부 경부가도에서 패퇴한 미군은 경부국도를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져 수많은 사상자와 포로를 남긴 채 옥천-영동 경부축선을 중심으로 영동심천 금강 이남으로 철수, 영동전투에 대비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특히 대전 철수작전에서 미24사단장 딘소장이 탄 지휘차가 운전병 실수로 인동사거리에서 금산방면으로 직진하다가 행방불명되었다. 딘소장을 구출하러 이원역을 출발 대전역에 도착했으나, 딘소장을 찾을 수 없어 다시 돌아오다가 세천터널 1km 앞에서 북한군의 기습으로 김재현 기관사는 순국하고 옥천 동이출신 현재영 · 황남호 부기관사가 빗발치는 증기기관차를 몰고 옥천으로 귀환했다.

7월 21일 저녁 옥천읍내 점령
북한군 점령기 옥천 어떤 일이?

 7월 20일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 주력부대는 하루 쉬었지만, 7월 21일 아침 북한군 1개연대 병력이 대전 세천에서 옥천 마달령 방면으로 접근하자, 21연대 1대대 미군 진지에서 기관총과 개인화기에서 불을 품었다. 얼마 후 미21연대는 미52 포병대대의 포사격 엄호 하에 옥천읍을 거쳐 영동으로 철수했다. 북한군 3사단 선발대는 옥천 증약리 마달령 고개의 미군방어선을 돌파하고 경부 국도를 따라 21일 저녁에 저녁에 옥천읍내 점령했다. 그리고 북한군 선발대는 이원을 거쳐 영동 심천 금강 상류인 양강교 북편 언덕까지 진출했다. 이원면 원동리 적등 마을에 북한군은 곡사포를 설치하고 포신을 심천 금강의 양강교 남쪽 방향으로 겨누었다. 이에 앞서 옥천농고에 설치되었던 미24사단 임시사령부는 영동으로 철수, 이전했다. 다음 이야기는 6.25를 겪은 옥천 어르신들의 말씀을 구술 채록한 것이다. 북한군은 미군기의 기총사격과 폭격 때문에 낮에는 10~20명씩 나누어 집집마다 헛간이나 비를 가릴만한 곳에는 즐비하게 늘어져 곤한 잠을 자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들 애기로는 “증약리 마달령 중턱에는 경부국도 상의 증약굴(터널)이 있는데 낮에는 북한 병사들이 미군 비행기 공습 때문에 굴속에 숨어있었다. 증약 마을 사람들에게 따발총을 맨 북한군이 밥을 해달라 해서 무서워 해줬고 밤에 이 부대는 남으로 내려갔고 또 다른 북한군이 와서 증약굴에 머물렀고 증약 사람들은 서회(군서)로 피난갔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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