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 옥천 어떤 일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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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옥천 어떤 일이(2)
  •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23.06.29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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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6.25 73주년

대전․옥천 국도변 시체, 썩는 냄새진동
북한군 식량자루 메고 저녁행군 

군서 김 노인은 “외가가 판암동이라 갔다 오다 보니, 판암동 옥천길 국도변에 전투가 치열했는지 미군시체가 즐비하고 세천고개 증약 마달령 고개 도로변 산에도 미군과 북한군 시체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또 옥천읍 초입인 국도 부근 서정리와 서화천 다리부근에도 양측 병사들 시신이 많아 어찌나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지 코를 사매고 집에 돌아왔다”고 회상했다.  북한군은 마을 입구에는 보초 감시병이 무장하고 출입하는 주민들까지도 통제를 하며 마을 주민들은 낮에 남자는 15세 이상, 60세까지 매일같이 노력동원이라는 미명하에 삽과 괭이를 들고 10~100리 멀다 않고 국도 변의 산에 올라가서 방공호나 참호를 파는 것 이었다. 그러고 부녀자들대로 젊은이들은 북한군 환영하는 행사에 동원되었다. 정 노인은 “북한군 인솔자 지시로 옥천 정거정 쪽에서 지게에 탄약을 지고 산길로 해서 경부철도 증약터널에 들어서니, 굴이 무척 길었고 땀이 범벅된 채 세천역 부근에 탄약을 내려놓았다. 안되겠다 싶어 도망갈 궁리 끝에 세천터널을 빠져 나왔을 때 오줌을 누는 척하다가 구렁 풀숲을 들어갔다 밤새워 세천수원지-군북 자모-이백리 산길로 해서 군서 월전리 집으로 돌아 왔다”고 아찔한 기억을 더듬었다. 낮에 인근으로 피난키 위해 남한 점령지 주민들이 몽땅 비워두고 나간 집들은 북한군 야전 숙소가 되었다. 오후 5~6시 경이면 북한군 사병은 개인별로 3일간 먹을 식량을 총탄 등 개인장비를 제각끔 자루배낭에 채워 넣고 어깨에 걸쳐 매고 총탄은 반대로 ×자로 질머진다. 군화는 없이 우리 농구화처럼 생긴 군화에 양말이라고는 보지 못하고 천으로 된 발싸개를 준비한다, 그도 여유가 없으면 빨아 널은 것으로 발을 싸매고 행군준비를 했다. 그리고 16세 이상 40세의 청장년은 의용군으로 강제 차출되어 남쪽 낙동강 전선으로 나갔다. 마을 인민위원회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매일 저녁이면 인민위원회 및 청년동맹, 부녀동맹 회를 밤 11시, 12시까지 하면서 그날의 성과 반성과 내일 할 일을 전달했다. 대전에서 퇴각하던 미군과 국군은 지역 주민들이 종종 설치해 놓은 조직적인 도로장애물을 만나고 유격대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대전전투에서 미군은 흰바지 저고리를 “흰파자마”로 미국인들은 한국인이 고유의상을 이렇게 불렀다. 미군은 이것을 입은 한국 사람은 누구든 잠재적으로 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미군은 유격대의 은신처로 의심되는 마을을 불태우기 시작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단지 유격대의 은신처를 없앤다며 마을 불태우기도 했다.

옥천학도병 옥천탈환 잠천
쫓기는 북한군 T-34탱크 5대 배치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국군과 유엔군은 일제히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여 북진하여 미21연대 선빌대는 김천을 우회하여 추풍령을 거쳐 26일 아침에 영동을 탈환했다. 그 당시 옥천탈환작전에 선발대로 참전한 옥천 학도병들의 증언에 의하면 “27일 새벽 2시 미24사단 19연대 선발대는 옥천읍 남부인 가풍리로에 탱크를 앞세우며 도착했다. 그리고 가풍리에서 연료 보충하기 위해 잠시 대기했고 27일 새벽 6시경 옥천 읍내를 탈환하였고 추석 다음날인 29일 대전을 탈환했다”고 전했다. 

옥천읍 삼거리에서 구읍으로 뻗은 서산성 산 위에는 흑인부대가 최전선을 맡고 있었고 북한군은 옥천읍 서정리 물레방앗간에 전차1대를 숨겨놓고 옥각리 입구 주막집 개울에 1대 그리고 수박다리 부근 송장바위 쪽으로 3대의 소련제 T-34탱크 포신을 미군이 방어선을 펼친 옥천읍내 동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옥천읍 옥각리 서편 은행나무가 있는 산에서 서쪽으로 서화천 송장바위 산기슭에 북한군 6, 7, 8사단이 방어진을 치고 북한군 2진은 군북면 이백리 하수종말처리장 주변 남청사 부근 산줄기에서 이지당으로 이어지는 서화천 북단까지 진을 치고 북한군 사단 cp지휘소는 군북면 환평리 환산 아래 고지대 마을인 고무시 마을에 위치했다. 

옥천 서북부와 대전 남부 지역에서 방어전을 펼친 북한군 사단들은 호남지방에서 북상하는 북한군 사단들이 대전을 통과하여 원활히 북상할 수 있도록 낙동강서 경부국도를 따라 김천-영동-옥천으로 진격해오는 미군을 견제하고 시간을 끄는 지연작전의 일환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일부가 유엔군과 국군이 수원, 천안, 대전 남진함으로써  이 당시 옥천읍 서북지역인 옥천읍 삼양 삼거리, 군서, 군북 일대와 대전 동남부와 북부지역 사이에 집결 중이던 북한군은 이미 유엔군과 국군에게 포위상황에서 3일간 마지막 대전전투를 치뤘다. 

북한군 탱크는 날이 밝자, 서화천을 경계로 남쪽인 삼양삼거리 재건산(삼성산)과 서산성을 비롯해 연 이어진 구읍 가리뱅이재, 지오리산성 산줄기까지 미군이 산 능선마다 참호를 파고 동서로 방어선을 펼친 것을 빌견하자, 오전 9시 서정리 철도터널 속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옥각리 은행나무 산줄기에 진을 쳤던 제1전선 북한군도 서화천을 건너 현 하수종말처리장 부근의 남청사와 이지당으로 펼쳐진 부근 산 능선으로 퇴각하였고 호죽기(색색이)는 쉴 사이 없이 공습을 가하는데 기총사격 기관총 소리로 귀청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간간히 기관포 소리도 요란하고 양 날개에 달고 다니는 기름통을 낙하하면서 화염포까지 쏴대어서 주변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어린 마음에 전쟁이라는 공포보다는 전쟁이 신기하기만 해서 시종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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