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고효자 조완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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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효자 조완기 선생
  •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23.07.06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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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조완기(趙完基)는 문열공 중봉 조헌 선생의 장남으로 임진왜란 때 아버지 옷을 입고 선봉에 서서 의병과 함께 왜군에 대항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순국한 만고 효자이다. 그는 1570년(선조 3년) 6월에 김포현 서감정리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 중봉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토왜적 격문을 띄우니, 조완기는 발을 싸매고 아버지 조헌을 도우며 쫒아 다녔다.

집에서 할머니 봉양하라

 이에 중봉 선생께서 “너는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할머니를 잘 봉양하라” 하였지만 그는 “아버지는 목숨을 내놓고 사지로 가는데, 자식이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고 끝내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으며 청주싸움에 참전하였다.

 그리고 다시 금산으로 왜적을 치러 갈 때 중봉 선생이 오지 말라고 하였으나, 완기 공은 듣지 않았다. 금산싸움이 불리하여 장차 패할 것을 알아차린 조헌 선생은 또 “네, 형제들 가운데 큰일을 담당할만한 놈은 오직 완기뿐인데, 그 애는 전날에 청주싸움의 첩서를 가지고 의주 행제소로 왔는데 돌아올 기약이 묘연하고 또 부자가 함께 죽으면 네 할머니는 누구를 의지하시겠느냐!”

울며 충신 아들노릇 할터

 “그러니, 너는 집으로 돌아가서 할머니를 보양하라“ 하였다. 이에 조완기 공은 울며 절하고 대답하기를 아버지는 충신이 되는데, 아들은 홀로 충신의 아들 노릇도 못하라는 말씀입니까?” 하였다. 

금산을 향해 진군해온 조헌 의병은 회덕(현 대전)을 거쳐 유성으로 진군하여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과 합세하였다. 8월 17일 조헌 의병과 영규대사 승병은 유성에 이어 금산 복수면을 거쳐 이날 저녁에 금산성 10리 밖에 진군하게 되었다. 의병과 승병들은 2일간 의 먼 길을 계속 행군하여 왔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몹시 지처 있었다.

 조헌과 영규의 군대는 금산성에서 북쪽으로 5리 떨어진 연곤평을 끼고 있는 경양산 뒤에 진을 치고 의병과 승병을 남북으로 포진시켰다. 다음날 8월 18일 왜군은 새벽부터 3대로 나누어 포위 공격을 해왔다. 일부 참모들이 조헌 의병장에게 아뢰어 후퇴하기를 논의하였으나, 오직 의롭게 싸우다 죽을 것을 서로 맹세한 의병들은 세 번이나 적을 격퇴시키는 혈전으로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조헌 의병장을 비롯한 부장 이광륜, 임정식, 이려, 곽자방, 박충검, 김절, 박현령 등 7백의사가 최후의 일각까지 용감히 싸웠으나,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치열한 금산성 싸움이 있은 뒤, 호서와 호남 지방은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게 되었다.

화려한 옷 입어 아버지 죽음 대신

 이 같은 혈전 중에 조완기 효자는 일부러 화려한 의관을 갈아입어 왜적으로 하여금 주장(主將)으로 오인케 하여 아버지의 죽음을 대신하고자 하였다. 

과연 금산의 왜적들은 조완기 공을  주장으로 오인하여 그 시체를 돌로 으깨어 시체마저 수습하지 못하였으니, 그 때 그의 나이 불과 23세였다. 아우 조범은 조헌 선생의 시신을 둘러업고 마전을 거쳐 서화천 길을 따라 옥천 안읍(안내) 도리동(도이리) 후율당 부근으로 옮겨서 유림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다.

 금산싸움이 끝난 4일 후 중봉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 등이 경양산 양지바른 곳에 7백의사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7백의총이라 이름하였고 국가사적 105호이다. 

효자정문, 종용사와 표충사 배향

 선조 때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고 1604년(광해군 7년)에 효자문이 정려되었다. 1663년(현종 4년)에 금산 칠백의총 내의 종용사에 배향되었다. 1673년(현종 14년)에 특별히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또 1734년(영조 10년)에 안남면 도농리 표충사(表忠祠)에 아버지 조헌 선생 위패와 함께 위패가 모셔졌다. 현재 효자정문은 안내면 도이리 후율당 마당에 아버지 조헌 충신문과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고 매년 봄 유림들에 의해 제향이 올려진다.

 조완기 효자의 묘소는 옥천 안내면 후율당에서 가까운 언덕에 있다. 후율당(後栗堂)은 조헌 선생의 사당으로 충청북도 기념물 제13호로 정면 3칸 측면 1칸 목조기와 팔작집으로 겹처마이다. 솟을삼문과 막돌담장이며 뜰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조완기 효자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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