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평대군 사부 유식(庾軾)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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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대군 사부 유식(庾軾) 선생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3.08.17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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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난세, 올곧게 학덕 쌓다
 
덕곡 유식(庾軾) 인조의 왕자인 인평대군 사부는 1586년(선조 19년)에 옥천군 안남면 도덕리 덕실 마을에서 태어나 64세인 1650년(효종 1년)까지 사신 조선 중기 문신이다. 그의 자는 자경(子敬)이며 호는 덕곡(德谷)이고 본관은 무송 유씨(茂松庾氏)로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개국공신인 시조 유검필 장군의 24대손이다. 그는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 당대의 최고 석학들과 함께 논산의 김장생, 김집 선생에게 동문수학한 문장가이자 성리학자였다.

유사부 호에서 덕실 유래, 덕양서당 
 
유식 사부 공의 호인 덕곡(德谷)에서 유래한 고향 마을의 이름이 덕실로 불려지며 마을 동쪽의 큰 산은 국사봉이다. 

어릴 때 일찍이 문자를 해득한 유식 선생은 효성 지극하였고 또한 형제간의 우애도 돈독하였다. 고향 안남면 도덕리 덕실 마을에는 선생께서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던 유서 깊은 덕양서당이 있으며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4호이다. 덕양서원이라 불려지기도 하는 이 서당은 1895년에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양서당은 정면 6칸에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여덟 팔자 모양의 팔작기와집이다.

‘덕양서당(德陽書堂)’이라고 쓴 현판은 조선 말기 좌의정을 지낸 문헌공 입재 송근수 대감의 친필이며 그 당시 대사헌을 지낸 문충공 송병선 선생의 '덕양서당기'가 대청에 걸려 있다.

조헌 추증상소문, 빼어난 문장가 
 
유식 선생은 인조의 셋째 왕자인 인평대군의 사부를 지냈고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중봉 조헌 선생 추증 상소문 지어 올렸는데 사계 김장생 선생께서 유사부 공의 상소문이 유독 잘되었다고 칭찬했다 한다. 광해군 시절에 과거시험 준비를 위해 한양 외각인 삼각산 절에서 공부했었는데 흉도들이 찾아와 인목대비 폐모론에 가담해줄 것을 종용했으나, 고향 옥천으로 낙향했던 일 있다. 이같이 그는 굳건한 절개로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하였다.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와 동문수학
 
일찍이 사계 김장생 선생과 김집 선생께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초려 이유태 선생과 함께 논산 돈암서원에서 동문수학한 성리학자이다. 그는 이 같은 학자들과 도의지교를 맺고 성리학은 물론 성력과 지리지설까지 배웠다.

유식 선생의 아버지인 주부 공께서 과거시험에 합격한 상으로 노비문서를 주려고 하였지만, 극구 사양하여 후에 어머니께서 억지로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한 효자이다. 1633년(인조 11년)에 송시열 선생과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학식과 덕망으로 1640년(인조 18년)에 인조의 셋째 왕자 인평대군 사부에 임명되었다.

그 후 군기시 주부, 장례원 사평, 목천현감 등의 관직을 지냈고 낙향하여 1650년(효종 1년) 7월에 생을 마쳤다. 장례 때는 당대의 석학이며 실세였던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초려 이유태 선생의 만사를 보내서 지금까지 전해진다. 그의 묘는 옥천군 안남면 화학리 학지산에 위치하며 묘지문은 송시열 선생이 지은 묘비가 있다.

덕양서당 옛세덕사 유검필, 유식 제향 
 
조선 인조 때 인평대군의 사부이셨던 유식 선생(유사부공)이 덕양사(德陽祠)를 지었고 여기에 서원을 함께하여 덕양서원 또는 덕양사라 하였고 학문은 물론 인격과 도의교육의 큰 역할을 하던 학당이다. 후에 흥선대원군의 이른바 서원철폐령에 따라 경내에 세워졌던 세덕사는 철거되었다. 이 세덕사에는 시조 태사 충절공 유검필 장군을 주향으로 모시고 그의 24세손인 유식 선생을 배향했던 사당이었고 1895년에 중수하였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유식 선생의 묘지문에는 “옥천에서 광해 임금 폐조 대부터 중봉 선생 의 향사로 인하여 서로 배척하고 혹은 헐뜯고 하였는데, 유사부 공이 지론(持論)을 준절하게 해놓으시니 이론을 제기하는 자들도 감히 흠집을 찾지 못하니, 유사부 공의 올바른 행의(行儀)는 여기에서 뚜렷하게 실지 사실로 경험하게 되었다”라고 썼다.

유식 사부 공이 살았던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중반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국토는 초토화 되었고 인목대비 서궁 유폐, 광해군 패악,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 내우외환의 격동과 혼란이 그치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러나 덕곡 유식 선생은 오직 학자와 올곧은 선비정신으로 난세에 학덕을 쌓고 후학을 가르치며 인평대군의 스승으로 평생 깨끗이 산 빼어난 문장가이자 성리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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