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재 송근수 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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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재 송근수 대감
  •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23.08.2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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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문신, 좌의정까지 관직 두루 역임 
 
입재 송근수(宋近洙) 대감은 1818년(순조 19년)에 태어나서 1903년(광무 7년)까지 산 조선 후기 중신이자, 성리학자로 본관은 은진 송씨이다. 자는 근술(近述)이고 호는 입재(立齋)와 남곡(南谷)이다.

그는 우암 송시열의 8대손으로 아버지 송흠학과 영일정씨 사이에 4남 1녀 중에서 3남으로 태어났고 영의정에 증직된 송흠락에게 입양되었다. 순국지사인 대사헌 연재 송병선과 송병순은 그의 5촌 조카로 1905년 을사늑약 후 고종을 알현하고 서울서 일본헌병대에 끌려 대전역에 내려 대전 소제동에서 전국의 제자들에게 국권회복의 대열에 동참하라는 간절한 유문을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송근수의 맏형 수종재 송달수(宋達洙)와 함께 송치규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였다. 이이-송시열-한원진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송능상-송환기-송치규로 이어지는 송시열의 성리학적 가학을 전수받았다.

송근수 대감은 대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가 홍문관과 승정원에 관리로 임명되어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고 지방관으로 외직에 나가서는 청렴결백한 공무수행과 백성들을 지혜롭게 다스리는 목민관이었다. 그는 이어 대사간, 대사헌, 이조, 병조판서와 의정부의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 등을 두루 역임한 행정의 달인이자 당대에 이름난 성리학자로 옥천을 빛낸 인물이다. 

그는 1848년(헌종 14년)에 처음 원릉참봉을 지냈고 그해 5월 증광문과에 급제하자 현종께서 특교를 내려 이르기를 “문정가(우암 자손)에 이런 인재가 있으니 정말로 기쁘다”하고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하나 그는 사양하며 오로지 성학에만 힘쓸 것을 상소했다. 

이어 부교리, 통정대부 병조참의, 1852년(철종 3년)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바로 이조참의가 되었고 이어 우부승지를 지냈다. 1855년(철종 6년) 좌부승지를 거쳐 그해 겨울 경주부윤에 임명되어서 청렴결백하게 백성을 지혜롭게 다스렸다.

1859년(철종 10년)에 이조참판, 1862년(철종 13년) 형조판서, 1864년(고종 1년) 의정부 우참찬, 한성판윤을 역임했다. 

1865년(고종 2년) 대사헌이 되었고 이해 3월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화양동 만동묘가 철폐되자, 괴산 화양동에 들어가 통곡하고 돌아왔다. 

1874년(고종 11년)에 공조판서를 제수받았고 의정부 좌참찬, 예문관 재학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지만 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병조판서에 이어 1881년(고종 18년) 좌찬성, 1882년(고종 19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1882년(고종 19년) 좌의정으로 있을 때 조정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교섭을 벌이자, 기독교의 폐해를 지적하고 일본 이외의 나라와 조약을 체결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사직소를 올렸다.

1884년(고종 21년) 갑신변복령으로 의재변개(衣制變改)가 발표되자, 상소를 올리고 사직, 옥천군 구읍과 동이면 석탄리 안터 마을 별채 보만재로 낙향하여 시서로 소일하였고 ‘재상산림’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퇴직 후 봉조하가 되었다. 1889년(고종 26년) 가을에 박성양, 송병선 등과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 용문서당(경현당 옆)에 모여 「송자대전」을 강의하고 다시 「송자대전수차」를 교정하였다.

1890년(고종 27년)에는 당시 시대의 폐습을 논의한 상소를 올려 그 때 백성들이 안고 있는 조세의 부담과 당오전의 폐해 등을 지적, 조세정책을 시정하고 개선할 것을 주장했고 지방관인 수령과 방백들이 백성들에게 수탈이 심함과 관직을 사고파는 폐해를 상소했다.  


그리고 급하지 않는 국가적 토목공사를 중지할 것과 외국에서 들여오는 사치품과 등을 물리치고 용도를 절도 있게 하면 온갖 폐해를 금하지 않아도 스스로 금할 것이란 상소도 올렸다. 1895년 단발령이 공포됨에 이에 항의하였으며 1895년 9월 문석봉 의병장의 대전 유성지방의 한말의병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말년에 옥천읍 교동리 저택(후 육영수 생가)에 낙향하여 살고 인근 동이면 석탄리 안터의 보만재 별채에서 주로 거주하며 살다가 감기로 1903년 1월 85세의 일기로 생을 마쳐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 오봉산에 묻혔다. 

저서로 1865년(고종 2년) 5월 대전 가양동 남간정사에서 이세연, 송익수, 송응수, 김용혁 등과 『송자대전수차』를 세 번째 교정을 하였다. 입재 선생의 시호는 문헌(文獻)공이며 아들 송병서는 급제하여 도승지,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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