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인의 기행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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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의 기행 여정
  • 김묘순 작가
  • 승인 2023.08.2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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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무에 영랑의 집을 찾은 이유

“기차로 한낮 한밤을 허비하여 이 강진골을 찾아온 뜻은 친구의 집 울안에 선 다섯 그루의 동백나무를 보러 온 것”이라는 정지용의 말에 동감한다. 여기서 강진골 친구의 집은 김영랑의 집일 것이다. 

흰 눈이 동백나무 가지에 내려앉는 날 새빨간 동백꽃 송이는 뭐라고 형언해야 하는가? 그때 나그네의 가슴 속에는 어떻게 박힐 것인가? 강진골은 집집마다 동백나무가 있고 무덤 앞에도 동백나무를 심어 쓸쓸한 처소를 봄과 같이 꾸민다고 했다. 이것을 정지용은 “남방에서 얻을 수 있는 시취(詩趣)”라고 적어놓고 있다.

그 시절 정지용이 들렀던 김영랑 생가는 현재 여러 개의 시비들이 세워져 있다. 그의 대표작들을 돌에 새겨 마당과 옆 마당 그리고 집안 곳곳에 세워 놓아 보는 이들을 시상에 잠기게 한다. 
생가 근처의 탑골샘을 지나 영랑 생가에 도착하면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 253호 영랑 김윤식 생가’라는 돌비석이 새겨져 있다. 아담한 초가집들이 먼저 반긴다. 마당은 쓸린 듯 다듬은 듯 황토로 잘 어우러지게 단장 되었다. 그 모습은 아주 단아하고 고즈넉하다. 영랑 생가는 담도 단정하다. 

또 시비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 「모란이 피기까지는」, 「사개를 건 고풍(古風)의 퇴마루에」, 「동백닙에 빗나는 마음」,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마당 앞 맑은 내 맘을」 등이 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마침 이 곳을 찾은 날은 비가 추적거리고 있었다. 우산을 들랴, 시비를 읽으랴, 구석구석 들여다보랴, 여전히 내 눈을 한 곳에 고정하기는 어려웠다. 장독대 앞의 우물은 잘 정리돼 있었고 우물은 밥을 먹을 때나 사용할 법한 상으로 야무지게 덮여 있었다.

김영랑 생가 옆에는 1930년대 한국현대시의 분수령을 이룬 ‘시문학파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1층에 세미나실과 20세기 시문학도서관 그리고 학예연구실이 자리하고 있다. 2층은 시인의 전당과 북카페와 쉼터테라스가 터를 잡고 있다. 개관은 매일 09:30~17:30이며 휴관은 1월 1일, 설날, 추석날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1년에 딱 3일만 문을 닫는다는 말이다. 지난해 경주 박목월 문학관에 갔을 때 월요일이라 문을 닫은 경우에 낭패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1년에 3일만 휴관하다니 참 이곳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3월 1일~16일은 시문학파 기념관 1층 야외무대에서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이하윤,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의 ‘시문학파 동인 대표시 깃발전’이 열리고 있었다.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 정지용의 「향수」, 정인보의 「자모사」, 이하윤의 「물레방아」, 변영로의 「논개」, 김현구의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렀습니다」, 신석정의 「임께서 부르시면」, 허보의 「검은 밤」이 깃발로 진열되어 있었다.

‘시의 향기를 머금은 곳’에는 시문학파에 대한 온갖 정보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김소월의 「진달래꽃」(1925)과 한용운의 「님의 침묵」(1926) 초간본 등 한국현대시사의 기념비적 시집들도 진열하고 있어 보는 이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지용이 강진의 김영랑 집을 찾았을 때 본 것 같은 혹은 보았을 수도 있었던 동백나무는 찾을 수 없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강진30-정지용이 1938년 다녀갔다는 강진골 김영랑 생가 앞에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가 잃어버린 세월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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