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의 전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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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의 전개(5)
  • 옥천향수신문
  • 승인 2023.08.24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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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의 관산성 재점령 및 영동 공격-1

위덕왕은 신라군이 옥천 대골쪽에서 모여 관산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화인진에서 금강으로 철수해도 되는데 굳이 관산성을 경유 철수하여 신라군에게 포위당하고 쫓기는 철수를 하였다. 

위덕왕이 위험할 필요가 없는데 위험을 자초한 것은 위덕왕 스스로 신라군이 관산성 밖으로 나와 추격하도록 미끼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왕이 신라군에게 죽은 후 위덕왕에 대한 호위가 허술할 리 없었을 것이고 또한 황골전설에 성왕이 신라군을 급습했다는 것은 다른 왕이 있다는 것으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철수하는 위덕왕은 가짜일 수 있다. 

가짜 위덕왕이 미끼가 되어 관산성을 점령한 신라군을 관산성 밖으로 끌어내고 진짜 위덕왕은 미리 식장산에서 백제군을 모우면서 안전하게 화인진에서 뱃길로 마산동산성 앞 내탑에 내려 세천을 경유 독수리봉산성에 오르고 옥천 할아비산성까지 가서 관산성 재공격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식장산 독수리봉에서 옥천쪽으로의 능선에 502고지 및 할아비산성 사이에 아래 사진과 같은 석축이 있습니다. 

독수리봉산성에서 할미산성까지 산성은 급히 축성하여 일반 성돌이 아닌 위 사진과 같은 성돌을 대강대강 쌓았고 502m 고지 보루가 그래도 가장 잘 쌓은 것 같다. 

그런데 골짜기의 경사가 급해 능선 길의 요철이 심하여 능선의 요철을 줄여 다니는 사람이 편하도록 사진과 같이 석축을 쌓았는데 급해서 산성조차 대강대강 쌓는 형편인데 전쟁 중에 병사나 장수들의 편의를 위해 석축을 쌓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 석축은 위덕왕이 이곳을 다녀갔다고 생각케 한다.

또한, 식장산 이름 유래의 전설 중 신라·백제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에서는 ‘백제 동성왕이 이곳에다가 군량미를 감추어 두었다고 해서 신라사람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또 대전지명지에 의하면 식장산은 ‘백제 때 성을 쌓고 군량미를 많이 저장해 놓고 싸움을 하였다는데서 생긴 이름, 숯고개, 숯재, 탄현성재라고 부르는 산높이 597m되는 산. 등 식장산에는 전쟁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그러나 식장산의 산세가 옥천쪽에는 경사 급하나 대전쪽에는 경사가 완만하다. 

따라서 고구려가 대전까지 내려왔을 때 식장산에서 고구려와 대항할 위치로 적합하지 않아 동성왕보다는 관산성 전투 시 위덕왕이 옥천 할아비산성까지 와서 가짜 위덕왕의 철수를 추격 신라군의 급습과 관산성 재점령을 위한 공격 지휘했고 후에는 독수리봉산성에서 지휘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에 탄현과 침현이 같은 곳으로 백제인들은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황골(승지골)이 이백리쪽 고리산 밑에 있는 황골이 아니라 고리산 북쪽의 항곡리 즉 황골이라는 것이다.
고리산의 제1보루쪽 골짜기가 짧고, 환산성과 그 부근 성지는 규모가 너무 협소하여 백제의 많은 병력이 주둔하기 부적합하다. 그리고 고리산의 1보루 높이가 355m, 제2보루 412m로 산성을 쌓기엔 산이 높고, 급경사이다. 

따라서 이 곳보다는 고리산 북쪽에 위치한 항곡리를 황골이라 하는데, 전설의 황골(승지골)을 항곡리로 볼 때 삼국사기 탄현이야기를 적용시킬 수 있다.

삼국사기 탄현(혹은 침현)에 관하여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서 소롯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 때가 되어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라 기록을 지도 1에 대입해보면, 가짜 위덕왕은 가르뱅지재(침현)을 넘어 용목리 경유 고리산 밑 황골옆으로 해서 고리산 북쭉의 항곡리(황골) 앞에 독골재에서 독골로 내려가면 대전 신촌동 그리고 세천쪽으로 철수를 했을 것으로 보이고 신라군도 이 길로 추격을 했을 것이다.

독골재 뒤에는 항골(항곡리)가 있고, 490년 만들어진 사현성이 있다. 식장산 할미산성쪽에 있던 백제군이 이백리쪽에서 신라군 후미를 끊고 공격을 하고 숯고개(탄현)쪽 백제군 일부도 바로 앞이므로 공격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신라군은 사진 좁은 계곡(증약에서 항골(항곡리)로 연결되는 계곡)길로 백제군을 추격을 하다가 후미에서 백제군이 공격해오니 진을 이루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또 백제군은 사현(항곡리산성)성 병력과 충원된 백제군의 일부가 고리산쪽으로 매복하다가 신라군을 공격했을 것이다. 그 골짜기에서의 전투 흔적으로 대전쪽에 백골산이라는 지명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백골산이라는 지명이 생길 만큼 여기서의 신라군의 희생이 큰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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