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인의 기행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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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의 기행 여정
  • 김묘순 작가
  • 승인 2023.08.31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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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노래 「때까치」가 짚이는 곳이

음력 정이월에 마른 나뭇가지와 풀을 물어다가 보금자리를 둥그렇게 지어놓고 3, 4월에 새끼를 치는 것인데 뜻 아니한 침략을 받아 보금자리를 송두리째 빼앗긴다는 것인데 이 침략자를 강진골에서는 ‘때까치’라 부른다고 한다. 

정지용은 이 때까치를 ‘물건너 온 적’이라고 표현한다. 반면 까치는 ‘조선 새’라 이르고 있다. 그러나 보금자리를 빼앗긴 까치떼가 대거 역습하여 다시 보금자리를 탈환한다면 낮잠이 달아날 만치 상쾌한 통쾌를 느낄만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 정지용은 1938년 김영랑, 김현구와 함께 여행을 하며 「남유다도해기」 12편을 마무리하였다. 이때는 일제강점기였다. 그렇다면 때까치는 무엇을 의미할까?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짚이는 곳이 있게 된다.

나는 노이령의 「물계자의 노래」를 생각한다. 

서 교수의 「<물계자가> 텍스트 복원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 계획서는 <물계자가>에 대한 원본 텍스트가 없는 까닭에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에 대한 배경설화 연구가 고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물계자가>라는 향가가 실제로 존재하였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텍스트 복원 계획은 너무 감상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나 서 교수는 수첩에 미완의 구절을 남기고 사라지고, 그의 조교는 서 교수의 글귀에 2구를 덧대어 붙여 박 경위에게 4구체 향가 <물계자가>를 완성하여 들려준다. 

석 장의 칼을 짚고 온 날 무겁다
무겁지 아니한 건 오직 내 이름뿐이다
충성이 이미 사로에 다했으니
가벼운 걸음으로 사체산으로 
들어간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미완의 노래에 뼈를 세우고 피를 돌게 하고 살을 덧댄 <물계자가>.” 이 노래는 웅웅거리며 맴돌다 억겁의 세월 뒤에 다시 노래가 되리라. 

<물계자가>가 만들어낸 신라 향가와 정지용이 만들어낸 그의 여정을 찾고자 백제 땅으로 향한다. 「정읍사」 백제 유일의 가요. 양쪽으로 쪽진 머리에 두 손을 마주 잡고 서있는 여인. 1000년의 사랑을 기다림으로 소금 행상을 나가 백제군에 징집되어 신라군과 싸우다가 돌아오지 못했다던 남편을 기다리며 그곳에 망부석으로 남아있는 여인을 지난다. 

<물계자가>와 「정읍사」 그리고 정지용의 여정을 따라가 보는 작업은 퍽 흥미로운 일이다. 정읍시에서 아양산 동쪽 기슭에 공원을 만들고 망부상을 세웠다. 망부상 앞면에 검은 돌을 박아 그 위에 정읍사 전문을 새겨놓았다. 백제 여인의 한없는 기다림 위에 정지용 문학의 푯대 하나를 세워두고 강진으로 향하였다. 

강진읍 영랑생가길 15에 위치한 순수서정시인 영랑 김윤식 생가는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생가 옆 시문학파 기념관에는 1930년대『시문학』을 중심으로 순수시 운동을 주도하였던 영랑, 용아, 정지용, 위당, 연포, 수주,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의 자료들이 그들의 문학세계를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1920~1950년대에 간행된 문예지 창간호 30여종과 1920~1960년대에 출판된 희귀도서 500여 권 등 총 5000여 권의 문학관련 서적이 소장되어있었다.

‘정지용 1902~1950 납북 이미지즘과 주지주의 시세계 개척’이라 소개하고『지용시선』(을유문화사, 1946),『정지용 시집』(건설출판사, 1946),『백록담』(동명출판사, 1950),『문학독본』(박문사, 1948),『산문』(동지사, 1949)이 전시되어 있다. 

정지용과 영랑은 휘문고보 선후배이다. 영랑이 박용철을 정지용에게 소개해주면서 한국문학사의 획을 긋는 시문학이 탄생된다. 정지용의 수필 「날은 풀리며 벗은 앓으며」에 박용철의 세브란스 병원 입원과 하학길에 박용철의 집을 방문하여 술을 마시고 호탕하게 얘기를 나누며 돌아오는 이야기를 하였다.    

또 용아 박용철은 영랑 김윤식에게 “지용, 수주 중 득기일(得其一)이면 시작하지. 유현덕(劉玄德)이가 복룡(伏龍), 봉추(鳳雛) 중 득기일(得其一)이면 천하가정(天下可定) 이라더니 나는 지용이가 더 좋으이.”라는 편지를 쓴다. 이로 보아도 박용철은 정지용을 참 좋아하였던 듯하다. 그러니 박용철을 1938년에 먼저 보낸 정지용의 슬픔이 오죽이나 크셨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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