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에 스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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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에 스미다
  • 박미련 작가
  • 승인 2023.12.14 1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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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태생부터 기름져야 하고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정한 길로만 걸어온 몸이라야 한다. 고향을 떠나 지름길로 달려온 놈이어야 하고 최적 온도에 몸을 단련시켜 내밀한 곳에서부터 풍미를 발산해야 한다. 죽어서 다시 산 그것의 미래는 순전히 주인의 손에 달렸다. 산산이 부서져 차가운 길바닥을 전전하는 종이컵의 신세가 될지 잡기도 아까운 미련한 커피잔을 제집 삼아 살게 될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놈의 운명이 내게 달렸다고 생각하니 숙연해지기까지 하다.

내려서 먹는 커피 맛에 빠진 후부터 정결한 원두를 데려오기 위해 꽤 비싼 값을 치르고 있다. 태생이 같은 것만 골라 난 늘 이주간의 몫만 데려온다. 신선한 놈을 구했다고 끝이 아니다. 시간과 물의 온도와 양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야 그것은 향으로 피어나 나를 설레게 한다.

우선 적당한 온도의 물을 부어 몸을 불린다. 몸집이 불어나면 일정한 양의 물을 개울물처럼 여리게 흘려보낸다. 몸이 잠길 때까지 인내하며 같은 세기의 물줄기를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거세면 맛도 거칠어져 순하고 기품 있는 향을 토해낼 때까지 기다릴 차례다. 충분히 물을 머금은 그것은 달곰쌉쌀한 향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코끝을 타고 들어온 그놈은 온몸에 서서히 차오른다. 마치 물 만난 고기 같다. 나를 거쳐 미려하게 유영하며 집 안 곳곳에 행복을 전달한다. 잠이 덜 깬 집안 공기가 첫사랑을 만난 듯 수줍게 들까불고 블라인드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은 흐르는 시간에 밀려날까 봐 불안한지 자꾸만 얼굴을 간질인다. 온전한 평화다.

이렇게 열일하는 그것인데 바쁠 때는 놓치기 일쑤다. 시간을 잊고 기다려야 하는데 전화벨이 울어대고 초인종이 요란해지면 여러 번의 수고를 한 번에 해결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알커피나 캡슐커피를 만지작거리다가는 그것이 주는 평화도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나를 달뜨게 하는 그것을 만나려면 무심히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커피는 대학 시절 자판기 커피로 인연을 맺었다. 달콤하고 쌉쌀한 맛에 크래커를 곁들이면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공부에 지치다가도 커피를 보면 몸은 쉽게 충만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기억만으로도 입은 헤벌쭉해지고 몸 하나하나의 세포가 살아나면서 이내 살갗이 팽팽해진다. 몽글거리는 가슴 새로 저장되어 있던 지난 이야기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어 야단이다.

유난히 그 친구가 좋았다. 우리는 많은 시간 함께했다. 끓어오르는 열정을 삭이려면 커피만 한 게 없었다. 라면값의 네배는 치러야 맛보는 한 잔의 커피, 사치든 허상이든 우리는 그 카페에서 커피를 마주하고 앉으면 순한 양이 되었다. 한 모금 축일 때마다 거친 마음은 누그러지고 서로를 향해 머리를 기울였다. 복잡한 일로 치열했던 20대에 커피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다독이곤 했다.

용돈 받는 날이면 가끔 비엔나커피도 즐겼다. 뜨거운 커피의 쌉싸래함에 얹은 차가운 생크림의 부드러움이 나를 안달하게 했다. 차갑게 다가와 긴장시키더니 그예 뜨거운 기운이 입술에 스미면 내 안에 두둥실 보름달이 떴다. 주변은 보름달에 물들어 은은하게 빛이 났다. 달의 부드러운 성품이 고단한 일상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비엔나커피는 주머니 사정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사치였기에, 몇 끼의 초라한 밥상을 각오해야 했다. 순수한 그것이 이성을 마비시키곤 하였지만 그래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이렇게 좋은데, 그것과 이별해야 하는 여러 번의 고비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어르고 달래며 아슬아슬하게 인연을 이어왔다. 단잠을 포기해야 하는 위험한 거래임을 알면서도 외면할 수 없었다. 늘 커피가 단잠을 이겼다.

게다가 내리는 커피 맛에 빠지고부터 욕심이 더해졌다. 원두의 맛이 오묘하게 다른 거다. 갖가지 과일 맛이 종합선물 세트처럼 입안에 머물더니 새콤함으로 산뜻하게 뒷맛을 정리해주기도 하고, 깊고 내밀한 곳에서부터 흘러온 진액이 묵직하게 폐부 깊숙이 스미기도 했다. 이 맛을 보면 저 맛이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다. 하루에 허락된 한 잔의 수위를 자주 넘나들었다.

잊고 있던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불면의 밤을 보내기 일쑤고 어느 날부터는 심장이 제 마음대로 날뛰었다. 느닷없이 쿵쾅거리기도 하고 알 수 없는 통증에 숨이 차기도 했다. 방망이질할 때마다 죽을병인가 하여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른 장기가 고장 나면 그래도 이별할 얼마간의 시간이 주어지지만. 그것이 고장 나면 단번에 붙들려가겠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조급함에 마음이 먼저 병원으로 달려갔다. 

“커피를 끊어야 합니다.” 의사의 말에 이별을 선언하고 지인들에게도 알렸다. 막연했지만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영원할 수 없는 만남임을 알았기에 더 몰입했는지 모르겠다. 드립 도구들을 찬장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일상에 커피가 빠지니 아침이 헐거워졌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식사를 챙겨 먹곤 하였는데, 아침 시간이 밋밋하고 나른하게 흘렀다. 매듭짓지 못한 나의 하루는 몰에 젖은 매생이처럼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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