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고효자 민진강 부사
상태바
만고효자 민진강 부사
  •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24.01.11 15: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효자 정려문: 옥천읍 서대리 솔고개 마을에
 
만고효자 민진강(閔鎭綱) 선생은 조선 중후기 문관으로 1659년(효종 10년) 현재 대전 유성구 도룡동(당시 공주목 유성)에서 태어났다. 자는 사정(士政)이고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며 본관은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의금부 도사를 지낸 효자 민환(閔桓)의 증손이며 민덕중(閔德重)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천성이 어질고 검소하며 홀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영민하여 우암 송시열 선생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 또한 높아서 학천으로 선공감 감역을 거쳐 군위현감, 종묘령에 이어서 남원부사를 지냈다.

1680년(숙종 6년) 3월부터 4월 사이 조선 조정에서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한 경신 대출척이 일어났다. 이때 민진강 효자는 스승 우암 송시열 선생의 무고함을 극력 변호하였다.  1722년(경종 2년)에 조선 후기 경종 연간에 발생한 신임옥사 때 화를 당한 노론 4대신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대신들이 장형과 사약을 받고 죽었을 때 김창집(金昌集) 선생을 두둔하였다. 

민진강은 관직에 나가 항상 청백하여 백성들이 감사나 수령을 기려 사당을 짓고 살아 있을 때부터 제사를 지내는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또한 민진강 부사는 평소 부모에 대한 효행이 깊고 탁월하였다. 1727년(영조 3년) 68세에 생을 마쳤다. 백년 후인 1832년(순조 32년)에 나라에서 효행으로 효자 정려문을 내렸다. 민진강 효자의 정려문과 묘소는 옥천군 옥천읍 서대리 송현(솔고개) 마을에 있다. 정려문은 익공 형식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건물 규모는 1평, 여흥 민씨(驪興閔氏)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민진강 부사의 「초산일기(楚山日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장례에 관하여 제자 민진강이 숙종 15년(1689) 6월 8일에서 7월 22일 까지의 내용을 일지의 형태로 그날 그날 필사한 일기이다. 스승인 우암이 정읍에서 사사하라는 후명(後命)을 받았을 때부터 수원 대로사에서 장례를 치루기까지 적은 『초산일기(楚山日記)』로 인해 뒷날 관직에서 민진강 부사는 파직을 당하였다. 초산은 우암 선생이 사사된 정읍의 한 지명이다. 그리고 대전이라는 지명이 민진강 선생의 1689년에 기록한 <초산일기(楚山日記)>에서도 확인된다. 이때 송시열의 유해를 운구해 갈 상여꾼은 회덕(현 대전)의 각 동네 사창계(社倉契)에서 조달했는데, 그 고을의 이름들 중에는 주산, 마산, 배달촌(송촌의 옛 이름) 등의 이름과 함께 ‘대전(大田)’이라는 동네 이름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이 「초산일기(楚山日記)」에 한영휘가 이담, 권상하, 이광하 등과 더불어 각각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1726년(영조 2년) 11월 24일 자 기록에 의하면 사간(司諫) 임주국이 상소를 올려, “남원부사 민진강이 정령(政令)에 관한 일을 제자(諸子)들에게 일임하고 있어 해괴하고 놀라운 일들이 한 가지만이 아닙니다. 교하 현감 이시정(李蓍定)은 성미가 술만 탐하여 해괴한 일들이 더욱 심하니, 이 두 사람은 또한 파직하여 여타의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상소에 대한 임금의) 비답하기를, “두 고을 원들의 일은 어찌 모두 믿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고 파직하지 않았다. 민진강 부사는 1727년(영조 3년) 68세에 생을 마쳤다.

1832년(순조 32년) 4월 13일에 예조에서 각 식년에 서울과 외방에서 충신과 효자, 열녀에 대해 장계를 조정에 올려 등급을 정했는데, 공주(유성)의 고(故) 부사 민진강에게 효자 정려가 내려지고, 그의 효성에 관해서는 우암 선생의 수제자인 권상하의 「한수재집」에 실린 기문 「애일당기(愛日堂記)」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애일당’이라는 그의 당호도 ‘효자가 날을 아낀다. 효자애일(孝子愛日)’는 「소학」의 한 구절에서 가져온 것으로 연로하여 자주 병을 앓는 어머니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담고 있다.

순종은 1910년(융희 4) 8월에 민진강 효자에게 규장각제학을 증직하고 효간공(孝簡公)이라는 시호를 부여하였다. 그는 자애와 은혜를 실천하면서 어버이를 잘 섬겼기에 효(孝)라하고, 덕행에 게으름이 없어서 간(簡)이라 하였다. 민진강 부사는 장남 민종수를 비롯하여 차남 민현수, 민처수, 민조수, 민점수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막내인 민점수는 동생에게 양자로 보냈다.

지난 1월 4일 각신서당 송시열 현판 글씨로 정정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