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인의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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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의 기행
  • 김묘순 충북도립대 겸임교수
  • 승인 2024.01.18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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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서)

두 춘은 최삼한기의 필명이고 아호다. 1908년 통영에서 태어난 그는 시인이며 교육자이다. 청마 유치환의 아버지 유준수가 청마의 형 동랑을 유학 보낼 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두 춘의 집안 사람들과 상의했으리라는 추측을 낳고 있다. 이미 두 춘의 외가쪽에 일본 명치학원 중학부에 다니는 박명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치환(1908~1967)과 동갑인 두 춘은 통영공립보통학교, 풍산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 조도전대학 제2고등학원에서 수학하였다. 통영여자고등학교 교감을 지냈다. 그는 1954년 안의중학교 6대 교장, 1960년 8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정지용은 유치환, 두 춘을 통해 마산의 시동인지에 「낙타」를 실었다고 하나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무대에서는 표준어 연극을 진행하는 동래여자중학교 학생들이 검도시합하듯 긴장하고 있다. 남편, 시어머니, 아들, 과부 역까지 모방하며 연극을 하고 있다.  

정지용은 “나는 평생 남의 남편 노릇 연습한 적 없이 남의 늙어가는 남편이 되어 이곳에서 남편 노릇 아내 노릇을 박수하며 견학한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동래여자중학교는 1946년 동래고등여학교를 6년제 동래여자중학교 개칭, 1951년 동래여자중ㆍ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그런데 동래여자중학교 연극부원이 실연을 하였던 부산여자중학교는 1945년 부산공립고등여학교로 창립, 1953년 부산여자중학교로 변경되었다.

두 학교에 전화를 수없이 하였으나 허사였다. 주말이라 학교가 비어있는 모양이다. 월요일에 다시 연락을 해봐야 하겠다. 부산여자중학교 호칭문제는 정지용의 앞서간 교명인지, 홈페이지에 오기가 발생된 것인지.

8. 정지용은 그때 알았을까
「통영(統營) 1」을 쓸 때 지리망산을 보았나?  -

“영도 향파 댁 유리창이 검은 새벽부터 흔들리고 새벽이 희여지자  가죽나무 잎이 고기새끼처럼 떤다.”며 정지용은 통영 가는 동안의 뱃멀미 걱정을 하였다. 청계는 “괜찮다.”고 답하고 180톤 배는 뽀오-를 발하며 잔잔한 바다를 건넌다. 영도, 송도를 뒤로하며 뭍산인지 섬산인지 모를 섬들을 연해 쏟아낸다. 섬에서 다른 섬으로 시집가는 오색찬란한 신부 일행의 꽃배에다 대고 손을 흔들고 모자를 저어 축하해준다. 정지용은 멀미를 하는, ‘하동산다는 열 살짜리 정명순’을 무릎에 누이고 바람을 막아주며 소년시절 유행가 정서를 회복한다.

그 당시 향파 이주홍이 영도에 살았는지 정지용은 향파 댁에서 머물렀는지 궁금하였다. 합천 이주홍어린이문학관에 전화를 하였다. 이곳에서는 “모르겠다”며 합천시 관광진흥과나 부산 이주홍문학관으로 연락해 보란다. 부산 이주홍문학관으로 연락을 하였다. 그러나 허사였다. 토요일이라서 근무자가 없는 모양이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일요일도 전화를 안 받는다. 그러면 월요일에 다시 전화를 해야 할 모양이다. 대부분 문학관은 휴일에 근무하고 월요일에 휴관을 하는데 이곳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낭패다.

정지용이 통영에 배를 타고 갔다. 제주도 배를 타고 갔다. 일본도 배를 타고 드나들었다. 나는 통영에서 유명한 사량도를 가보기로 하였다. 정지용이 통영에서 바라보았을지도 모를 사량도 지리망산.

통영 가오치항에서 11시 배를 타고 사량도에 도착하였다. 

지리망산은 등산로가 험해서 등산시간이 길다. 그래서 남편은 숙소는 미리 예약해 두었으니 등산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말로만 듣던 지리망산 산행은 녹록치 않았다. 달바위(400m), 가마봉(303m), 옥녀봉(281m)을 가는 것은 숫제 종합유격훈련장이었다. 능선을 따라 오르고 내렸다. 능선은 날카로운 유리가 날카로운 칼을 거꾸로 세워둔 것만 같다. 깎아지른 바위를 기어서 오른다. 오른쪽을 봐도 왼쪽을 봐도 바다다. 아름답다기보다 무섭다. 조금만 삐끗하면 바다로 착륙할 것만 같다. 앞을 보니 철계단이 90도 각도로 버티고 있다. 뒤를 보면 수없이 낭떠러지다. 오금이 저렸다. 태어나서 처음 이렇게 험하고 무서운 산에 올랐다. 

나는 촌에서 태어난 촌놈이라 산하고 친했다. 봄이면 고사리를 꺾고 진달래꽃을 따먹었다. 여름이면 소를 몰고 다니며 풀을 뜯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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