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인의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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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의 기행
  • 김묘순 충북도립대 겸임교수
  • 승인 2024.01.25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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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도 있으면 더 재미있었다. 송아지의 그 여린 털빛이 이뻐서 자꾸만 배며 머리며 엉덩이를 쓸어주었다. 파리도 쫓아주고 진드기도 잡아 주었다. 고추밭 언저리에 있는 물외도 따먹고 당근도 캐서, 잎은 송아지 주고 뿌리는 내가 먹었다. 그럴 때면 송아지의 그 초롱한 눈에 내 얼굴이 비쳤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순수’라는 단어를 설명하기에 적당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다. 가을이면 산으로 들로 내달려 메뚜기와 살진 미꾸라지를 잡고 알밤을 주워 앞니로 껍질을 까먹었다. 

겨울에는 나무를 하고 토끼사냥을 다녔다. 오빠는 발 시리다고 나에게 제대할 때 신고 온 군용워커를 신겨줬다. 발은 워커 안에서 저절로 놀았지만 끈을 바짝 조여 빠져나오진 않았다. 토끼 사냥은 눈에 발이 푹푹 빠지는 날이 제격이다. 그런 날 토끼가 배가 고파서 밖으로 나온다고 하였다. 배고픈 토끼를 잡기위해 배부른 사람들이 나서서 토끼를 몰았다. 그때는 그것이 재미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영 마음이 아프다. 어렸을 적 나는 잔인했거나 생각이 많이 모자랐던 모양이다. 이렇게 사시사철 산에서 자라다시피한 내가 산이 무섭기는 처음이었다. 산이 왜 무서웠을까? 바다가 있어서였나보다. 내가 겪은 산은 바다가 없고 가재가 사는 계곡만 있었다. 그러니 넘어져도 바다로 다이빙한다는 두려움은 없었다. 산은 험하고 바다는 깊어 남들이 좋다고 칭찬하는 풍광을 보지 못 하였다. 앞만 보고 걸었다. 아니 남들이 보았다면 기어가 놓고 걸었다고 말한다고 웃을 일이다. 

출렁다리도 지나야만 하였다. 이것도 무섭다. 그러나 남편은 우회도로로 가려면 시간이 많이 지체된단다. 그러니 아래를 바라보지 말고 건너란다. 해가 저물어가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5미터쯤 가니 더 이상 발을 옮길 수가 없다. 속이 울렁거리고 떨어질 것만 같았다. 뒤로 돌아섰다. 우회도로로 돌고 돌아서 가다 넓은 바위에 앉아 커피와 컵라면과 사과를 먹었다. 산에 오르기도 힘든데 이렇게 준비해서 여기까지 짊어지고 온 남편이 고맙다. 살짝 모자란 사람과 사느라고 애쓴다는 생각이 드니 비죽이 웃음이 새어나왔다. 사람들은 왜 무서운 것을 재미있다고 하는지 영 모르겄다. 정지용은 충무바다에서 이곳을 바라봤을까? 이렇게 날카롭게 깨진 유리가 솟구친 것 같은 산이란 것을 알고 있었을까?  

9. 월이와 밀정 
「통영(統營) 2」의 견내량은 장대에 창을 달아 개조개를 캤다는데 

통영 연안은 한류와 난류가 만나 어류가 총집합한다고 정지용은 적고 있다. 멸치, 대구, 도미, 갈치, 개조개 등을 잡아 일본, 중국, 마카오 등으로 수출한다고 하였다. 견내량의 어부들은 긴 장대 끝에 창을 꽃아 물밑을 찔러 통영 개조개를 캐낸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산대첩의 배경이 되었던 이곳은 현재 암초가 많고 물살이 세서 최적의 미역서식지로 손꼽힌다. 임금님 진상품이었던 견내량 돌미역은 양식미역보다 두껍고 탄성이 좋아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견내량 인근 어민들은 옛 선조들이 돌미역을 채취하던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이들은 긴 나무 막대기를 바다 깊숙이 꽃아 바다 밑에 자란 돌미역을 돌려 감는 방식으로 채취한다. 돌미역은 이곳 주민들의 소득증대에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고 한다.

견내량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유인하여 궤멸시킨 역사의 현장이다. 1971년 이곳은 740m의 거제대교가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를 이으며 육로가 생겼다. 이제 더 이상 섬이 아닌 곳이 되었다.

정해룡은 소설 「조선의 잔다르크 월이」에서 월이를 “논개보다 더 거룩하고 더 위대한 충절의 여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정해룡은 월이가 살았던 무기정 우물을 같이 먹고 자랐다. 시인이었던 그는 “문학을 하면서 내 고향을 소재로 작품 한 편은 써야 한다는 마음의 큰 빚”을 지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진주 논개는 적장 하나를 안고 갔으나 월이는 일본의 함대 26척과 3500여명의 수군을 전멸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5세기 후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게이테스 겐소 등의 승려를 공식 사절(밀사, 밀정의 역할 수행)로 파견한다. 이들은 조선의 해변지도 작성과 민심 등을 탐지하며 동래, 부산, 낙동강, 진해, 마산을 거쳐 서울까지 두루 살피느라 6개월 이상씩 체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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