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독
상태바
고 독
  • 김기순 수필가
  • 승인 2024.02.08 12: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는 시나 소설, 노랫말에 나오는 단어인 줄 알았습니다. 외롭다는 말은 함부로 쓰지 않는, 부끄러운 단어인 줄 알았습니다. 외로움이라는 말은 시간을 탕진한 무책임한 사람들의 넋두리라고, 욕망의 허기를 미화한 천박한 언어라고 치부했습니다. 외로울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왜 외로우냐고 따갑게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외롭습니다. 내가 외로운 것이 몹시 자존심이 상합니다. 일분일초도 소홀함 없이 잡도리했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곧추세우고 한 눈 한 번 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외로움이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언제 어느 때 사전 협의를 했던가요. 뻔뻔하게도 일언반구도 없이 불쑥 들이닥쳐서는 나를 희롱하고 있습니다. 오만불손하게도 애매모호한 명분을 내세워 도도한 나의 이성을 짓밟고 있습니다. 매우 화가 나고 기분이 언짢습니다. 외로움 따위가? 감히 나를 어쩌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외로움쯤에 눈도 꿈쩍 안 할 줄 알았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슴팍으로 시리도록 차디찬 바람이 씽씽 불고 숨어 있던 상처들이 초하의 우후죽순처럼 뾰족뾰족 솟아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유행가 가사에나 붙어 지낼법한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리움이라는 여우 같은 놈이 내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배회합니다. 이놈이 더 눈에 거슬립니다. 백을 거꾸로 세어도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써도 잠이 오질 않습니다. 밤그림자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침없이 들이대는 졸개들 때문입니다. 허전함, 쓸쓸함, 아쉬움 이 모두가 외로움의 졸개들입니다. 

 졸개들까지 동원 한 걸 보면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싶어 대적을 하려니 심기도 불편하고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어쩌다 이런 가소로운 졸개들과 쟁투하는 처지가 되었나. 약이 오릅니다. 분명한 것은 지독한 놈임이 틀림없습니다. 무척 센 놈한테 걸린 것 같습니다. 어찌나 옴짝달싹 못 하게 조목조목 까발리는지 그 이유가 열 가지가 넘습니다.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습니다. 이유라는 것 중에는 늙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늙은 것도 서러운데 늙었다는 이유로 외로움을 감내해야 한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웃기는 것은 욕심이란 것도 있습니다. 언제 내가 욕심을 부린 적이 있던가요. 참으로 야비한 것은 주로 밤을 틈타 나타납니다. 낮에는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해질녘이면 불면 졸개들을 대동하고는 스멀스멀 기어 나와 나를 덮칩니다. 캄캄한 밤 요요한 적막이 휘감아 올 때쯤이면 나는 고독의 최면에 걸립니다. 비상하지 못하고 빙빙 돌다가 멈춰 선 시공 속에서 언어를 잃어버리고 자유를 잃어버리고 꿈을 잃어버린 채, 도살당하는 소처럼 눈만 멀뚱멀뚱 천정을 봅니다. 방문 틈서리로 부연 새벽빛이 새어 들어오고 까악까악 살 오른 암까치의 우짖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혹독한 최면에서 풀려납니다. 빨갛게 충혈된 눈, 어질어질한 현기증, 몽롱한 정신, 깔깔한 입이 모두가 외로움에게 당한 후유증입니다.

 어쩌면 지나친 편견일 거라고, 부정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그러니 이해하자고 노력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외로움, 상상만 해도 몸이 근질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역시 나와는 궁합이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무가치한 비적으로 하여 자존심이 손상되고 고고한 이성이 유린당하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궁리를 모아 외로움을 쫓아낼 특단의 조치를 찾아보았습니다. 이 고약한 외로움을 몰아내기에는 여행이 딱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낭만과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야말로 외로움을 몰아내는 비책일 거라고 부푼 가슴을 안고 패키지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더니 낭만과 멋을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던 여행의 꿈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패키지여행의 빠듯한 일정은 그 무엇을 감상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버스 안의 생소한 소음과 귀갓길 버스 안의 낯선 풍경을 적응하기에는 괴리감이 느껴졌습니다.

  외로울 때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누군가 귀띔을 해줬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더군요. 말이 좋아 친구 모임이지 모이기만 하면 신경전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자식자랑 남편자랑 재산자랑 집안자랑 그 어느 것도 내세울 게 없는 나로서는 기죽기 꼭 좋은 곳이 친구 모임이었습니다. 상처의 골만 깊게 늘어나는 곳이 친구 모임이었습니다.

  외로움에는 뭐니 뭐니 해도 독서만 한 명약이 없다 싶었습니다. 한동안 독서 삼매경에 빠져 지냈습니다. 나름대로 도움은 됐지만 문제는 노안이었습니다. 돋보기에 의지해서 책을 읽으려니 노안이 감당을 하지 못했습니다.

  외로움이란 놈이 얼마나 교활한지 나처럼 호되게 당해 본 사람이 아니고는 공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증스럽게도 불리하다 싶으면 눈치껏 도망갔다가 틈만 보이면 머리를 들이밀고 들어옵니다. 하루 종일 친구들과 웃고 떠든 날은 아뿔싸, 손쓸 사이도 없이 공허 졸개들이 들이닥쳐 나를 물고 뜯고 난리를 칩니다. 소식 뜸한 아들이라도 기다리는 눈치면 영락없이 그리움이라는 졸개들이 동원되어 사정없이 가슴을 후빕니다. 감기라도 걸렸다 싶으면 떼거지로 몰려와서 나를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칩니다. 아주 고약하고 비정한 놈들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