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의 여름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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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의 여름나기
  • 손수자 수필가
  • 승인 2024.03.0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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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면 텐트 생활을 하면서 물소리를 자장가 삼고 매미 소리에 잠 깨던 그해의 여름나기가 소중한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한여름을 아파트에서 더위와 씨름하기보다는 솔바람과 계곡물이 있는 곳, 집터를 닦아 놓은 어성전에서 텐트를 치고 지내기로 했다.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텐트를 비롯한 야영에 필요한 물품을 사고 밑반찬을 마련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바닷가에서 야영하느라 장만한 이후 처음이었다. 아들은 야영 장비를 차에 싣고 양양으로 향하려는 우리가 염려되었던지 틈나는 대로 와서 함께 지내며 안전을 확인하겠노라고 했다. 벌써 자식에게 보호받을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생소했다.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향하는 유목민들의 마음이 그러했을까? 야영을 위해 떠나는 나는 기대와 희망으로 마음이 부풀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텐트를 치고 살림 도구를 정리하는 손이 리듬을 탔다. 침구는 텐트 안에, 취사도구는 키 큰 감나무 아래에 놓인 평상에 정리해 놓았다. 마치 소꿈장난하는 기분이었다.


일손을 놓고 텅 빈 땅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텐트를 바라보았다. 가슴 설레었던 마음은 다 어디로 갔는지 부푼 마음이 바람 빠진 듯 허전했다. 바닷가에서 텐트 안으로 들락거리며 좋아하던 두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각각 가정을 이루어 우리 품을 떠나고 지금 이곳에는 없지 않은가. 노년에 이른 부부가 야영하겠다고 텐트를 치고 보니 웬 궁상이냐 싶기도 했다. 하지만,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어 떨쳐버렸다. 나는 지금 내 삶의 여정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숲속의 아침은 매미 소리에 깨어났다. 단잠을 깨우는 매미가 야속할 법도 한데 오히려 청아한 그 소리에 상쾌한 아침을 맞았다. 그런데 매미의 세계에도 위계질서가 있는 모양이었다. “맴 맴 맴~” 어느 매미 한 마리가 낭랑하게 외치면 그 첫 신호에 따라 숲에서 잠자던 수많은 매미가 일제히 화답했다. 고요한 산골에 갑자기 매미들의 합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매미는 위계질서뿐만 아니라 시간도 잘 지켰다. 첫 신호를 보내는 매미 소리가 거의 같은 시각에 들렸다. 휴대전화 시계로 그 시각을 알아보니 이른 아침 다섯 시 이십 분 경이었던가. 다음 날, 그 다음 날에도…. 신기하게도 매일 2~5분가량의 오차만 생길 뿐이었다. 경이로운 매미의 모닝콜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감나무 그늘에 놓인 평상은 거실 겸 주방 역할을 했다. 손님이 오면 평상에 앉아 차를 나누고 음식을 만들어 식사했다. 식단은 주로 텃밭에서 뜯어온 푸성귀로 짜였다. 풋고추, 호박, 감자, 여러 종류의 쌈 채소, 거기에 왕고들빼기 잎과 돌미나리 등 산야초까지 더해지면 고추장과 된장만 있어도 진수성찬이었다. 신선한 푸성귀의 풋풋한 향은 한여름 식욕을 돋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평상에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지기도 했다. 그럴 때 살랑바람이 지나가다 눈꺼풀에 내려앉아 스르르 잠들게 하곤 했다.


집 앞 계곡은 천연 수영장이었다. 작은 물웅덩이에 많은 사람이 와서 물놀이했다. 우리는 채소밭에서 잡초를 뽑다가 땀에 젖은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 그대로 계곡에 몸을 담갔다. 적당한 유속으로 흐르는 맑은 물이 마사지까지 해주니 월풀(Whirlpool) 욕조가 부럽지 않았다. 물에서 나와 서성거리다 보면 젖은 옷이 저절로 말랐다. 찜통더위를 이기기에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까. 산촌 밤하늘의 별은 유난히 크고 반짝거렸다. 우리는 그 별을 바라보고 ‘주먹 별’이라 부르면서 영롱한 별빛이라는 표현을 실감했다. 좁은 하늘에 웬 별이 그리도 많은지! 북극성과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가 선명했다. 


나는 내 시력이 나빠서 별이 잘 안 보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또렷하게 보이는 저 별들이 도시의 조명등 불빛에 가려 제대로 빛을 전달하지 못한 것이다. 고향 집 마당의 멍석에 누워 별자리를 찾던 때를 떠올리기도 했다. 은하수가 흐르고 가끔 별똥별도 떨어지던 고향 집 마당이 눈에 삼삼했다.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씩 품고 있을 자기만의 별 하나. 나는 이곳 남쪽 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새로 점찍었다.


텐트 안에서는 쉽게 잠들지 못할 때가 많았다. 밤늦도록 왁자지껄하던 이웃 펜션이 자정이 넘어서야 조용해진 밤, 잠들려고 하면 두려움 같은 것이 스멀거렸다. 풀잎 흔들리는 소리에 뱀이 기어 오는 것 같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산짐승을 떠올리게 했다. 사람의 발걸음 소리에도 긴장되니 쉽게 잠들 수 있겠는가. 남편은 잠 못 이루어 뒤척이는 아내는 아랑곳없이 깊은 잠에 빠지기 일쑤였다. 내가 남편의 불침번을 서게 된 셈이다. 텐트는 남자의 대범함과 여자의 소심함이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했다.


야영 생활은 생각보다 어려움이 없었다. 식수와 화장실은 우리 땅과 이웃해 있는 민박집의 배려로 이용할 수 있었고, 미리 와서 심어놓은 채소는 풍성한 찬거리가 되었다. 계곡을 찾아온 사람들이 밤낮으로 북적거려 우리도 그들처럼 피서 온 사람일 따름이었다.


텐트 생활을 하는 동안 전원생활의 터전을 닦아 나갔다. 가끔 이웃들을 초대하여 삼겹살 파티를 열어 친분을 쌓았다. 외지인이 이곳에 먼저 와서 정착한 경험담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랫마을 원주민들과는 상면할 기회가 적었지만, 만날 때마다 겸손하게 머리 숙였다. 원주민들이 외지에서 이사 온 사람들을 배척할 거라는 친지들의 우려가 기우에 불과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낯선 환경에 적응해가는 것은 그야말로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관계는 내가 먼저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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