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 성리학자 연재 송병선 순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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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 성리학자 연재 송병선 순국지사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4.03.2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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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경술국치로 본인,동생 순국

송병선(宋秉璿) 대한제국의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며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고종황제를 접견하고 대전에 귀향 자결한 순국지사이다. 그는 1836년(헌종 2년)에 대전시 동구 성남동에서 태어났고 자는 화옥(華玉)이고 호는 연재(淵齋)이며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은진 송씨로 쌍청당 송유(宋愉)가 중시조이며 우암 송시열 선생의 9대손이다. 할아버지는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된 송흠학(宋欽學)이며 아버지는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된 송면수(宋勉洙)이며 그의 장남이다. 송병선은 송달수 참의와 그의 동생 좌의정을 지낸 입재 송근수 대감은 당숙으로 동생 송병순과 함께 주자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그의 동생 송병순(1839~1912)은 1910년 한일합병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자, 옥천 활산(현재 영동 학산)에서 자결한 순국 지사이다.

올 곧은 유학자, 임명된 관직에 불취

연재 송병준 선생은 1876년(고종 13년)에 ≪근사속록(近思續錄)≫을 편찬하였고 1878년 태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뒤에 경연관, 서연관, 시강원자의, 사헌부 대사헌 등에 선임되었으나 역사 나가지 않았다. 1895년 신하들의 의복(의관)을 양복을 바꾸는 의제변개(衣制變改)를 극력하게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듬해 연재 송병선 선생은 옥주(沃川)의 산속 물가에 누벽정(樓碧亭)을 짖고 도학인 성리학을 강론하는 데에만 몰두하였다.

옥천 이지당, 삼남지방 첫 강론 시작

그 당시 옥천 이지당(二止堂)에서 처음 강론 시작하여 삼남 지방을 순회하며 지방 유림들에게 성리학의 예론과 국권회복에 대한 강론을 하였다. 이후 연재 선생에게 사사 받은 경남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노응규(盧應奎) 의병장과 공주 유성의 문석봉(文錫鳳, 1851~1896) 의병장 등 삼남 지방의 많은 제자들이 의병 활동에 뛰어들어 활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옥천에 살며 사림의 영수로 추앙받던 전 대사헌인 송병선(宋秉璿) 대감은 1905년 12월 30일 을사늑약 후 망국의 통분으로 한양 대궐에서 고종을 알현하여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기강을 세울 것 등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그리고 대궐을 나오자 경무사 윤철규에게 납치되어 남대문역(現 서울역)에서 경부선 열차에 강제적으로 태워져 대전역에서 내렸다.

왕 알현 낙향 자결, 여종 따라 자결

대전역에서 소제동 송시열 선생 옛집인 송자고택에 돌아와서 을사늑약에 통분을 못이겨 전국의 유생과 백성들에게 유서를 써놓고 북쪽을 향해 네번 절하고 음독자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여종 공임(公妊)이도 통곡하며 주인인 송 대감을 따라서 식도로 자결하였다. “그가 자결하자, 사노비로 있던 공임(恭姙)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는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송병선 선생은 그의 순국 정신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국가와 백성 위한 의리정신 실천

입재 송병선 선생의 순국 절의정신의 실천은 바로 전통적인 성리학의 근본적인 백성과 왕에 대한 의리정신인 절의정신을 숭상하는 학문과 사상에서 나왔다. 즉 유학 사상의 줄기이며 우암 선생이 전 생애를 통해 내세웠던 춘추대의정신(春秋大義情神)의 계승에서 나왔다. 도한 서구열강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위정척사운동에 근거하였다. 위정척사운동에서 위정(衛正)은 정학(正學)인 성리학을 옹호하는 것'이고 척사(斥邪)란 '사악(邪惡)하다고 판단되는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격하는 것이다. 그는 서학을 배척하며 혹은 선비정신을 진작시켜 서구열강과 일본 등과의 통상조약 체결을 반대하였다.

대전 송자고택, 송시열 살았던 옛집

대전 소제동 송자고택(宋子古宅)은 송시열 선생께서 1653년(효종 4년) 짓고 4년간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암 선생은 조선시대 대유학자이며 성균관 문묘 대성전에 공자를 비롯한 4성, 10철, 6현과 그리고 한국의 동국18현의 위패를 모셔 매년 봄가을로 제향을 올린다. 송자고택 부근에 소제 방죽과 기국정(杞菊亭)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송자고택은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9호이며 기국정은 원래 소제동 소제호 주변에 있었으나 경부철도 대전역이 생기면서 남간정사가 있는 우암사적공원 부근으로 이전했다. 한편 연재 송병선 선생은 평소 당숙인 송근수 대감 등을 만나기 위해 옥천을 자주 찾았다. 또한 틈틈이 옥천 이원면 구룡촌의 경현당이나, 이지당을 자주 찾아 후학들에게 강학하였다. 그리고 옥천동이 석탄리 안터 송근수 선생의 별채 보만재를 찾아 주자 성리학의 예학 등 학문적인 교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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