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논단
정지용의 시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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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논단
정지용의 시론 4
  • 김묘순 옥천문인협회원
    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 승인 2017.02.02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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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9월, 중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던 10여편의 정지용 작품이 삭제되었다. 국가이념과 민족정신에 반하는 저작물을 정리한다는 문교부의 방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정지용에게도 이러한 현실적 상황은 거센 파도가 되어 불어 닥쳤다.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서 삭제된 이유를 김문주(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교수는 “반공 전선이 본격적으로 구축·확산되던 당시 상황이 해방 이후 경향파적 성향을 노정하면서 조선문학가동맹에 적을 둔 이력이 작용”하였다고 설명한다.

이는 당시 누구나 그랬듯이 정지용에게도 중대한 현실적 문제였다. 그는 1949년 11월 4일 남로당원 자수 선전주간에 국민보도연맹에 공식적으로 가입한다. 당시 정지용은 동아일보에 「詩人 鄭芝溶氏도 加盟 轉向之辯 心境의 變化」(1949. 11. 5.)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다.

 

나는 소위 야간도주하여 38선을 넘었다는 시인 정지용이다. 그러나 나에 대한 그러한 중상과 모략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내가 지금 추궁하고 싶지 않은데 나는 한 개의 시민인 동시에 양민이다. 나는 33년이란 세월을 교육에 바쳐왔다. 월북했다는 소문에 내가 동리 사람에게 빨갱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집을 옮기는 동시에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던바, 보도연맹에 가입하라는 권유가 있어 오늘 온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우리 국가에 도움 되는 일을 해볼가 한다.

 

정지용이 살았던, 아니 살아내야만 하였던 일제말기는 핍진하고 표독스러웠다.

1937년 중일 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시 총력체제의 구축에 따라 1939년 10월 ‘조선문인협회’를 결성, 친일 문인단체를 조직하게 된다. 이들은 조선어 사용 금지, 창씨개명, 신사참배 강요 등 민족말살정책을 펴며 침략정책 합리화를 위한 정신무장의 일환으로 국민문학론을 내세웠다. 문학계도 이러한 혼란의 시대가 비껴가지 않았던 것이다. 피해갈 수 없었던 슬픈 현실이다.

인간은 불합리하다고 자각하면서도 현실에 처한 관념이나 행위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이때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일이라며 침묵하거나 떠나버린다.

해방은 많은 문학인에게 기쁨과 환희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고단했던 일제강점말기의 과오를 청산해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해방공간에서 문학인은 비틀거리며 푸대접 받던 우리 문학을 바로 잡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집중하여야만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에게 역사적 과거에 대한 자신의 과오 비판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때 이광수는 자기변명으로, 최재서는 침묵으로, 유진오는 문학과 절연하고, 채만식은 작품을 통해 자기비판을 감행하게 된다.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자기비판이다. 1945년 12월 김남천의 사회로 「문학자의 자기비판」이라는 좌담을 진행한다. 만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지지 않고 승리했다고 생각해보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생각했고 어떻게 살아가려고 생각했느냐가 자기비판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승리한 일본과 타협하고 싶은 마음을 입 밖에 내기도, 글로 쓰기도, 행동으로 표시될 리도 없다. 그러니 남이 알 리 없으나 나만은 이것을 덮어두고 갈 수 없는 것을 자기비판의 양심이라 한다며 겸허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남도 나쁘고 나도 나쁘고 가 아닌 남은 나보다 다 착하고 훌륭한 것 같은데 나만 가장 나쁘다고 긍정하는 힘 이것을 양심의 용기라 하였다.

이 무렵 정지용은 「윤동주 시집 序」에서 ‘붓을 잡기가 죽기보다 싫’은, ‘천의를 뒤집어 쓰’고, ‘병 아닌 신음을 하’고 있다. ‘才操도 탕진’하고, ‘용기도 상실’하고, ‘8·15 이후에 부당하게 늙’어간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서술은 극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현실적 고통과 무력감을 아무런 역사적 전망을 갖지 못한 채 견뎌내던 정지용의 고백에 가깝다. 폭죽 같은 찬란한 담소로 황홀하게 정신을 빼앗고 말던 사교계의 왈패꾼 정지용은 가혹한 현실 앞에서 붓을 잡기가 죽기보다 싫은 한계에 도달한다. 그리고 재조도 탕진하고 용기도 상실한 병 아닌 신음을 뱉어내며 나약하게 늙어갔다. 정지용의 겸허한 양심의 용기는 무엇이었는가? 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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