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다 쉬는 날, 우린 왜 일터로 갔나
상태바
남들 다 쉬는 날, 우린 왜 일터로 갔나
  • 박현진기자
  • 승인 2018.01.04 12: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8년 1월1일의 옥천 거리는 한산했다. 수년 전부터 구정(음력 1월1일)이 설 명절로 지정돼 양력 1월1일은 그냥 하루 쉬는 날쯤으로 인식된 탓도 있다. 특히 올해는 지난해 연말부터 이어진 황금연휴의 마지막 날로 직장인들은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거나 용암사 해돋이를 보며 한해의 각오를 다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도 쉬지 않고 어김없이 자신의 일터를 지킨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만나봤다.                                                                <편집자주>

 

용무 급한 사람들 어쩌라고요

택시기사 이승남(45)씨

택시기사 이승남(45)씨는 동료 기사들에 비해 나이는 젊은 편이지만 98년도에 택시를 시작한 20년차 베테랑 기사다. 그 경력으로 9년 끌면 명이 다한다는 택시를 벌써 3번이나 바꿨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런 이씨가 다른 대부분의 동료들처럼 택시기사 생활 초반에는 절대 나오지 않던 1월 1일 근무를 하게 된 것은 작은 의문 하나에서 비롯됐다. 바로 “새해 첫날이라고 해서 아픈 사람이 없을까, 급한 용무로 택시가 꼭 필요한 손님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이 의문이 그가 5년 전부터 1월 1일에도 쉬지 않고 운행을 하는 이유가 됐다.
그럼에도 재작년 1월 1일은 정말 지루하고 힘들었다고 했다. 반나절을 손님은커녕 사람 그림자도 볼 수 없었던 것. 그러나 피투성이 환자를 병원 응급실에 데려다 준 일, 열차시간, 버스시간, 중요한 약속시간 등을 놓치지 않으려는 승객을 무사히 태워다 준 일 등을 생각하며 겨우 참아냈다고 한다.
그는 “사실 1월 1일은 손님도 없고 벌이도 시원찮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승객의 인사나 구수한 덕담 몇 마디를 듣는 행복이 쏠쏠하다”고 말했다. 또 ‘친절함에 대한 세뱃돈’이라며 다른 사람 주려고 가지고 가던 새해 선물을 기어이 놓고 내리는 손님도 있다고 전했다.
그게 사람 만나는 재미고 정이라는 이씨는 옥천개인택시지부 지부장으로 일하면서 모범운전자회 회원으로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근무 순번 닿으면 불가피 해요

아파트 경비원 박희태(64)씨

아파트 경비원 대부분은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가 퇴직 후 전직을 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ㅎ’ 아파트 경비원 박희태(64)씨는 대전의 대형 아파트 단지에서 10년 이상 관리인으로 일한 경력이 있는 소위 ‘전문 경비원’이다.
동료와 함께 근무일지를 써가며 격일제로 일을 하고 있어 1월 1일에 순번이 닿으면 어김없이 근무에 나서야 한다. 그러나 박씨는 “의무라는 생각보다는 어떤 날이든 아파트 단지에 경비원이 없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여겨왔다”고 말했다.
박씨는 출근하면 청소, 쓰레기 분리수거는 물론 환자가 발생한 세대에 119를 호출해주기도 하고 전기, 주방, 욕실 등의 시설기사 출동 시 보조를 해주기도 한다. 또 택배나 우편물, 음식물 주문 배달 시 각 동의 출입문을 열어주는 일도 중요한 일과 중 하나라고 했다.
그중에서 박씨가 으뜸으로 꼽는 것은 바로 ‘아이 돌보기’다.
그는 유치원이나 학원 차량이 들어오면 꼭 그 곁으로 가 아이들이 안전하게 탑승하는 것을 지켜본다고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경비실을 나가 단지 내 운행차량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주는 신호등 역할도 한다.
박씨는 “오며가며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는 아이들이 꼭 내 손주를 보는 듯해서 눈을 뗄 수가 없다”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박씨가 ‘아파트 단지에 경비원이 없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여기게 된 이유이고 1월 1일에도 출근을 하는 이유다.

 

직행버스엔 휴일이 아예 없어요

시외버스기사 정헌석(61)씨

새해 첫날, 옥천시외버스정류장도 오가는 사람이 없이 썰렁했다. 광장에 대기시켜 놓은 빈 택시의 주인인듯한 두 세명이 대기실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때 청주발 영동행 직행버스 한 대가 옥천의 승객을 태우기 위해 정류장으로 들어왔다.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차에서 내리는 버스기사 정헌석(61)씨를 만났다.
정씨는 청주에 거주하면서 청주 소재 운송사에 근무한 지 30년째라고 했다. 자판기 커피 한잔으로 추위를 달래는 그의 얼굴에 얼핏 새해 첫날을 맞은 사람답지 않은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 정씨는 “30년째 늘 해오던 일인데도 집사람이 오늘따라 걱정을 심하게 해선지 마음이 좋지 않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청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다음날 첫차 운행 예약이 돼 있으면 그 지역에서 묵을 수밖에 없다”며 “시외버스 기사들은 1년에 반은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니 걱정이 많은 건 당연하다”고 어려움을 꺼냈다. 
그러나 정씨는 이내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기사의 안전이 곧 승객의 안전이고 남의 가족을 지키는 일이 곧 내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며 “30년 운전으로 깨달은 건 안전한 운행을 위해서는 스스로를 먼저 편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운행 전 준비운동 하듯이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행버스가 쉬는 날이 없듯 승객 안전을 위한 그의 마인드컨트롤도 365일 풀가동 중이다.

 

하루라도 놀면 야채 숨이 막혀요

공설시장 야채가게 황외순(66)씨

연말 따듯했던 영상기온이 다시 영하로 곤두박질한 새해 첫날의 오후 늦은 시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환하게 불이 켜진 옥천공설시장에서 칼국수를 먹고 있는 황외순(66) ‘신호야채’ ‘사장님’을 만났다.
“엄마! 왜 이제야 식사를 하세요?” “응, 때를 놓쳤어”
변죽 좋은 질문을 변죽 좋게 받아치는 황씨는 뚝방 주변을 옮겨다니며 노점상을 하다가 7년 전 새로 지어진 지금의 공설시장에 들어왔다며 “천국이 따로 없다”고 말했다.
농사지은 야채로 장사 시작한 지 25년. 하우스에서 작업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대신해 공설시장에 자리를 잡은 것만도 행운이라는 얘기다.
새벽에 손주들과 용암사에 올라가 해맞이도 하고 떡국도 먹고 왔다는 황씨는 “일단 나랑 가족들 건강하고 시장에 사람 좀 많게 해달라고 빌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황씨는 “시장에 사람이 많으려면 대형마트가 그만 생겨야 한다”며 “이 좁은 동네에 대형마트가 왜 그리 많은지, 마트끼리 서로 번갈아가며 세일을 해대니 재래시장에 손님이 안 온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25년 동안 단 한번도 1월 1일에 쉰 적이 없다는 황씨는 “우리가 파는 건 다 생물이라 덮개를 덮어두면 야채들이
숨을 못 쉬어 다 시들어 버린다”며 “또 1일날 신정 밥상 차리는 단골손님들이 있어서 내가 문을 닫으면 그 사람들이 장볼 데가 없다”고 오히려 손님 걱정을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