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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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비밀
  • 김정자 수필가·문정리 지니카페 대표
  • 승인 2018.02.2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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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 수필가·문정리 지니카페 대표

헌 달력을 떼어낸 자리에 새 달력을 바꿔 걸었다. 달력의 마지막 장을 떼어내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세월이 정말 빠르다는 식상한 핑계를 대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는 궁색한 변명도 늘어 놓아보지만 밀려드는 회한에 의기소침해진다. 새로울 것도 없이 다가온 두 번째 달에 들어있는 2월이다.
특히 이번 설 멸절이 2월 중순에 끼어 있어 겨울이라 하기도 그렇고 봄이라 하기에도 어설픈 그런 달이다. 봄소식을 물어오는 3월에 등 떠밀려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나 그렇게 2월은 일 년 중에 가장 짧은 달이다.

긴 겨울 방학을 끝내고 그동안 다녔던 정든 학교를 떠나는 졸업식이 있다. 학창시절 내내 즐거웠던 추억도 무수히 많았지만 초등학교 졸업식 기억이 가슴 한쪽에 멍처럼 박혀있어 잊혀 지지 않는다. 지금도 2월이 되면 언제든 다시 꺼내 볼 수 있는 바래지지 않는 사진처럼, 초등학교 졸업식 때의 기억은 퇴색도 되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2학기 겨울 방학이 끝나갈 무렵 어린 나이에 가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었다. 동네 분들께 인사도 잘해서 어른들 눈에는 일찍 철든 모습으로 비춰졌고, 나이는 어리지만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서 오기로 뭉쳐있는 야무진 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의 나의 꿈은 멋진 군복을 입은 여군이었다. 그런데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 되기 위해 그 꿈을 져버리고 졸업식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름대로 틈틈이 공부를 했다. 하지만 중학교 진학마저도 포기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겨 그때부터 학교를 가지 않았다.

졸업식은 다가오는데 학교에 오지 않은 내가 궁금하고 걱정이 되신 선생님이 나를 만나러 우리 집으로 찾아오셨다. 애써 몸을 숨기고 엄마랑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졸업식 때 우수한 학생에게 주어지는 상과 선행상을 받게 되었다고 그날은 꼭 학교에 오라는 말을 남기고 가셨다. 당당하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마냥 들떠 졸업식 날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나의 자존심 때문에 졸업식도 참석하지 않았다. 졸업식 분위기에 들뜬 친구들이 운동장에 모여서 왁자지껄 쉴 새 없이 웃고 떠들고 있는 모습이 떠나질 않았고 지금쯤이면 졸업식이 진행되어 노래를 부르며 친구들은 헤어지기 섭섭함에 눈물을 흘리겠지?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졸업식 노래가 귓가엔 들리는 것 같아 끝내 참았던 눈물이 나왔다. 그 자존심이 뭐라고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도 고집스레 끝까지 밝히지 않은 그 울음의 속사정은 지금도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살면서 겪고 아파하며 가슴에 담았던 수없이 많은 기억들 중에 유난히 어릴 적 처음으로 맞이하는 졸업식 기억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졸업시즌만 되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되살아난다.
당당하고 싶었기에 친구들에게조차 말 못하고 졸업식의 간절함이 그림처럼 내 기억 속에 머물러있는 것이다. 그 기억은 아마도 오랜 세월 동안 해마다 2월이면 줄기차게 거르지 않고 생각나서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쳤을지 모른다.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을 준비하는 1월과, 봄의 시작을 준비하는 3월의 사이에 끼여서 주목받지 못하고 훌쩍 지나가 버리는 2월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거리를 훑고 지나가는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고 맹추위가 극성을 부린다. 이제는 그 추억의 힘으로 60줄에 도착했다.길 건너편 횡단보도 쪽이 소란스럽다. 어느 학교에서 졸업식이 있었는지 꽃다발을 든 학생무리가 우르르 길을 건넌다.
환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을 희석해 버릴 듯이 맑고 경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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