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과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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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과 훈장
  • 유자효 지용회장
  • 승인 2018.09.2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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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효 지용회장

한민족의 대표적인 DNA 가운데 끈질긴 귀소본능이 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경. 이는 추석이나 설이면 기차표와 비행기표가 일찌감치 동나고 전국의 고속도로가 귀향 차량들로 몸살을 앓는 데서도 잘 알 수가 있다.

자신의 성공을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그야말로 ‘비단옷 입고 밤길걷기’다. 부모가 돌아가셨더라도 자신과 후손의 모습을 산소 앞에 보여드려야 한다. 그리고 죽으면 선산 발치에 묻히고 싶어하는 것이 한국인의 보편적 심리였다.

한국 시인들의 시에 유독 고향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한국인의 귀소본능과 무관치않다. 이는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 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려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일본으로 평생 타향을 떠돌았던 지용에게 고향은 언제나 돌아가고픈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지용에게 고향 옥천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었다. ‘또한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이기도 했다.

그 고향은 ‘차마 꿈엔들 잊’을 수 없는 절대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는 매연을 이 구절로 끝내 고향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노래했다.

지용의 ‘향수’에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이란 구절이 있다. 지용의 미덕은 어릴 때 부모가 짝지워준 아내를 결코 배신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당시 일본 유학생들을 비롯한 숱한 지식인들이 부모가 정해준 아내를 버리고 연애를 통해 신식 아내와 재혼을 했다. 거기에는 우리 신문학의 개척자 춘원 이광수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파인 김동환 등 많은 선각자들이 마치 패션처럼 조강지처를 버렸다. 그 와중에 김우진과 윤심덕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 현해탄에 몸을 던지는 일도 있었다.

이런 시대에 일본 유학생 출신이자 당대의 대표적인 시인인 정지용은 아내외에 다른 여자가 없었다. 대학 교수와 언론사 주간 등으로 일하며 ‘문장’을 통해 신인들을 배출한 당대의 기린아 지용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감싸고 있었겠는가? 연애를 통해 만난 아내도 아닌 여성에게 순애보적인 사랑을 바친 정지용은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가 타향에서 입신한 뒤 찾아본 고향은 어릴 적과는 달랐다. 그곳은 이미 ‘그리던 고향은 아니’었으며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쓴 곳이었다. 그것은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른 구름. 고향에 대한 상실감은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정서와 다르지 않다. 어릴 적 기억 속의 고향은 성장한 나의 눈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는 것이다.

지용이 평생 그리워하던 고향 사람들이 고향의 아들 지용을 찾았다. 그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짊어지고 처참하게 생을 마쳤다. 그는 오랜 기간 남에서 사라진 이름이었으며, 북에서도 챙기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

정지용이 복권된 지 30년. 해마다 지용제를 열어 그의 문학을 현창해온 고향 사람들이 그에게 문화훈장을 추서할 것을 정부에 건의한 것이다.
그의 제자들이 이미 금관문화훈장을 비롯한 갖가지 훈장을 받은 마당에 오히려 새삼스럽고 때늦은 감도 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고향 사람들이 나서서 이뤄지는 일이라는 점이 감동적이다. 한때는 그에게 등 돌렸던 고향 사람들이 이제는 그를 고향의 자랑으로 비단옷을 입혀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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